일본 지성에게 일본의 길 묻다 ① 나카소네 전 총리 - 김영희 대기자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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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최고 원로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3) 전 총리는 일본 ‘원자력산업의 아버지’다. 1950년대에 원자력 평화이용에 대한 입법을 주도하고 예산을 확보해 원전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당시의 초선의원 나카소네였다. 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나카소네는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고, 일본뿐 아니라 세계 원자력산업과 전체 에너지 전략의 미래를 고민한다. 지진·해일 이전에 나카소네를 인터뷰한 중앙일보가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던 중에 대재앙이 일어나 김현기 도쿄특파원이 긴급히 나카소네에게 추가 질문을 해 답변을 들었다. 나카소네는 신중했다. 국민과 정부가 위기극복에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 원전 관련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다. 그는 일본의 신화적인 복원력만은 확신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왼쪽)가 도쿄에 있는 일본 세계평화연구소 사무실에서 김영희 대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18년생으로 93세의 고령인 나카소네 전 총리는 귀에 보청기를 끼고 인터뷰에 임했다.


김현기=일본 사회 대원로로서 지진·해일·원전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 정치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나카소네=국난 극복을 위해 결속한 국민과 함께 필사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부의 대책에 불충분한 점이 있으면 지적해 강화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김현기=이런 위기 극복에 필요한 정치지도자의 덕목은 뭡니까.

나카소네=반드시 돌파·재건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을 명백히 밝히는 것입니다.

김현기=이번 사태로 원전산업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바꿔야 합니까.

나카소네= ….

김현기=한국인들도 일본 돕기에 나섰습니다.

나카소네=한국 정부와 국민에 감사합니다. 가혹한 체험에 대한 우리의 대응 정보를 한국에도 제공해 긴밀한 관계 발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앙북스에서 펴낸 한 국어판 『보수의 유언』.

▶김영희=작년 92세의 고령에 수준 높은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한 건 놀랍습니다. 총리의 정력의 샘은 마르지 않는 것 같은데 잘 알려진 참선 말고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하시는 게 있습니까.

▶나카소네=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또 자다가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메모합니다.

▶김영희=총리의 책에는 깊은 통찰과 풍부한 지식과 방대한 정보가 가득한데 지금도 독서를 왕성하게 하십니까.

▶나카소네=독서는 몸에 밴 습관이라서.

▶김영희=간 나오토 정권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일본 정국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나카소네=올 상반기에 총리 사퇴든 총선거든 결말이 나겠죠. 아마도 민주당 패배, 자민당 컴백일 수도 있지만 자민당 단독정권은 힘들겠지요.

▶김영희=동아시아경제협력기구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시는데 중국이 미국이 참가하는 그런 기구에 들어오려 할까요.

▶나카소네=미국 등 다른 나라들이 찬성하면 중국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기구라야 중국의 폐쇄적 민족주의도 극복됩니다.

▶김영희=요즘 일본 정치인들이 공부를 안 한다고 걱정하시는데 총리와 요즘 정치인들의 차이는 예컨대, 총리가 대학시절에 많이 읽으셨다는 칸트와 중국 고전들을 공부하고 안 하고의 차이입니까.

▶나카소네=오늘의 정치인들이 결코 공부를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배경이 다릅니다. 전쟁 전에 교육을 받은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았어요. 전후에 일본 전체가 많은 반성을 했고, 이런 반성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이 당시 20∼30대였던 우리 세대였어요. 그래서 세계적인 지식욕에 불타 맹렬히 공부한 거죠. 우리는 전쟁의 잔혹성을 몸으로 실감하면서 일본 고유의 존재 방법과 길을 탐구하고, 국제적인 일본을 재건하는 시대를 살아온 인간들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폭은 넓을지 몰라도 깊이에서는 우리 세대가 앞선다고 생각해요.

▶김영희=일본 우경화의 실체는 뭡니까.

▶나카소네=애국심입니다.

▶김영희=나쁠 것 없다는 건가요.

▶나카소네=나쁘지 않아요. 민족주의 없이 국가가 성립될 수 없어요. 그쪽으로 너무 기울면 나라가 망하지만.

▶김영희=총리께서는 저서 『보수의 유언』에서 지도자의 조건으로 목측력, 설득력, 결합력, 인간적 매력의 네 가지를 들었는데 그건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1919년)에서 말한 지도자의 세 가지 조건인 정열, 책임의식, 판단력의 21세기 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카소네=그래요. 그건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정치인들이 갖출 보편적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희=제3세계처럼 낮은 발전단계에 있는 나라는 지도자의 조건도 다를 수 있습니까.

▶나카소네=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어떤 지도자에게나 가장 중요한 건 설득력과 앞을 내다보는 눈입니다.

▶김영희=작년에 일본은 세계 제2위 경제대국의 자리를 중국에 빼앗겼습니다.

▶나카소네=그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해요.

▶김영희=일본이 2위 자리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나카소네=순위를 따지는 것보다는 국민생활이 윤택한가, 국민이 행복한가가 정치의 기본입니다.

▶김영희=중국의 부상, 군사대국의 존재감이 심상치 않은데 대응방법은 뭡니까.

▶나카소네=과거 일본이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국민에게 참혹한 일을 겪게 한 경험을 중국에 숙지시키는 겁니다. 국력이 강해지면 자칫 반성하는 자세를 잃습니다. 정치인과 국민 모두 그래요. 일본의 잘못은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있었어요. 그때 일본 국민까지 자만에 빠졌어요.

▶김영희=미국·일본·인도가 단독으로 또는 집단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을까요.

▶나카소네=중국에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힘을 가진 나라는 없어요. 중국 국민이 아시아에서 가장 사려 깊은 국민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경제와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일본 같은 경솔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요.

▶김영희=한국·일본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중 이해가 충돌하면 전략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을 텐데요.

▶나카소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그걸 세계를 향해 발신해 주변국들과 세계 각국의 목소리를 끌어내 중국과 미국이 반성하도록 유도해야 해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충분히 가능한 시대가 됐어요.

▶김영희=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의 세기가 도래했습니까.

▶나카소네=아직 오지 않았어요. 물질적인 풍요만으로는 안 돼요. 아시아에는 세계성을 가진 철학이나 지도이론이 없습니다. 서양은 기독교의 뿌리를 가지고 오랜 역사를 통해 국민이 얻은 교훈이 있는데 그걸 바탕으로 하는 이론적인 지도자들이 탄생했어요. 아시아는 그런 깊은 경험이 없어요. 앞으로 여러 가지 공부도 하고, 선각자가 나와야 합니다.

▶김영희=유럽처럼 그런 공통의 문화와 전통이 없는 아시아에서 동아시아 공동체가 가능할까요.

▶나카소네=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아요. 경제협력기구로 출발하면 돼요.

▶김영희=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은 뭡니까.

▶나카소네=아시아 각국이 발전·성장하는 걸 음지에서 지원하는 거지요. 경제협력과 학술협력 등 여러 방법이 있어요.

▶김영희=일본이 그 정도로 개방적입니까.

▶나카소네=최근엔 비교적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어요.

▶김영희=일본은 지금 글로벌화와 국민국가의 기로에 서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일본 국민의 공감대가 한계를 드러낸 것 같은데 일본의 선택은 뭡니까.

▶나카소네=기본은 국민국가입니다. 국민국가는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계성을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어요. 점점 좁아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민족주의는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에요. 세계적이지 않으면 민족주의도 설 자리가 없어요. 지금 일본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비율이 50대 50 혹은 60대 40, 아니면 55 대 45 정도 된다고 봐요.

▶김영희= 그 정도면 됩니까.

▶나카소네=과거 전쟁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결과였고, 국민은 참혹한 피해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교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본 국민은 민족주의의 해악과 한계를 잘 알아요.

▶김영희=총리가 강조하는 전통과 문화의 정치적 기능은 뭡니까.

▶나카소네=전통을 무시하면 발전하지 못해요. 과거의 일본처럼 문화·역사·전통을 너무 중시해 전쟁 도발이라는 사도(邪道)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걸 반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김영희=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사진=박소영 도쿄특파원

◆나카소네 야스히로=1918년생. 47년부터 2003년까지 중의원의원 20회 당선. 82∼87년 총리. 83년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 방문. 총리 재임 중 ‘전후정치 총결산·국제국가 일본’의 목표 아래 국철과 일본전신전화공사·전매공사를 민영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는 ‘론·야스’ 관계를 구축해 미·일동맹의 기초를 다졌다. 2003년 정계은퇴. 현재 세계평화연구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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