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브랜드정책으로 일본 소주시장 석권”-김태훈 진로재팬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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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진로'-정확히는 'JINRO'-라는 브랜드의 위력은 대단하다. 최근 일본 소비자 조사결과 브랜드 인지율이 90%에 달했다. 일본 소비자 10명 중 9명은 'JINRO'를 알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시장에서 한국상품이 이만큼 알려진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의 진로 본사는 97년 화의에 들어갔지만 일본에서는 이만저만한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다. 진로소주가 일본에 선보인 지 20년 만이며 진로의 일본 현지법인 진로재팬이 설립된 지 11년 만이다.

배타적이기로 유명한 일본시장에서 '신화'에 가까운 성공을 거둔 주인공은 진로재팬의 김태훈 사장(47). 88년 진로재팬을 직접 설립해 지금까지 영업일선에서 진두지휘해 왔다. 그가 진로와 인연을 맺은 것은 85년. 당시 진로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한 장진호 회장이 서울고 동기동창인 김사장에게 진로의 일본영업을 맡긴 것. 그때까지만 해도 김사장은 섬유업체 서광산업의 오사카 주재원으로 한창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김사장은 86년 진로의 도쿄사무소를 개설한 뒤 주류수입면허를 따낸 후 2년 만에 현지법인으로 승격시켰다. 첫해 영업실적은 7백㎖짜리 12병들이 박스 기준으로 20만 박스. 이것이 지금은 4백만 상자로 20배나 늘어났다. 소주중에서 단일 브랜드로서는 시장점유율(8%)이 일본내 톱이다. 기세를 몰아 2년내 연간 50만 박스(6천만병)를 돌파할 계획이다.

또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91년 이후에는 매년 30∼40%씩 성장해 왔다. 지난해 매출액은 2백억엔이며 영업이익은 30억엔. 매출액이 이 정도면 일본에서도 중견기업 수준이며 소주업체 중에서는 6위다. 게다가 매출액의 15%를 영업이익으로 남겨 수익력도 매우 높다. 직원수도 처음 두 명에서 지금은 1백50명으로 불어났다.

"고비마다 어려운 판단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들어맞아 성공의 원동력이 된 듯합니다. 92년 4월 일본의 주류업계가 물류코스트를 반영해 일제히 가격을 인상했을 때입니다. 그때 '진로재팬은 다른 업체들이 올린 것보다 10%를 더 올린다'고 선언했습니다. 고가격 정책을 처음 도입한 것이지요. 7백㎖짜리의 경우 일본 소주가 7백엔인데 JINRO소주는 7백70엔을 받았습니다. 품질에 자신이 있어 '좋은 물건은 비싸게 판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제품과의 가격차를 유통업체에 많이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술장사에게 'JINRO를 많이 팔면 팔수록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준 것이지요. 이 고가정책이 유통상들에게 자극을 줘 매출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거꾸로 일본소주보다 싸게 팔았다면 지금 JINRO는 일본에서 죽은 브랜드가 됐을 겁니다."

김사장은 고가정책을 펴기 시작한 후 할인판매를 철저히 막았다. JINRO는 고급이고 비싸다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실히 뿌리내리기 위해서였다. 또 유통업자들과의 신뢰관계도 꾸준히 다졌다. 이들은 마진이 많이 남자 스스로 JINRO소주를 적극 팔아줬다. 고가정책은 정확히 들어맞아 JINRO소주는 급성장했다.

93년에는 매출이 두 배로 뛰면서 파죽지세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95년에는 판매량이 1백만 상자를 돌파했다. 한국상품으로 과감한 고가정책에 성공했다고 해서 일본의 메이지대와 한국의 경북대 경영학과 교수들이 공동으로 케이스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이때 김사장은 또 한 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JINRO소주는 원래 틈새상품으로 출발했는데 어느덧 1백만 상자를 팔고 나니 회사의 정책을 재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틈새시장으로 조금씩 이익을 남기면서 현상유지를 할 것인지, 일본업체와 정면승부를 벌일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96년부터 일본업체와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10억엔을 들여 TV를 통해 대대적인 광고를 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TV광고를 내는 한국업체는 대한항공 한 곳 정도였습니다. 광고 전 소비자들의 JINRO브랜드 인지율은 42%였으나 3년 후에는 90%를 넘어섰습니다. 이 정도면 일본의 톱브랜드가 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10억엔을 안 썼으면 고스란히 영업이익이 10억엔 더 늘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그 돈을 써서 더 팔고, 더 남기면 된다고 생각해 광고를 낸 것이 장기적으로 역시 큰 효과를 봤습니다."

잘 나가던 진로재팬도 97년 4월 진로 본사가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가고 화의절차를 밟게 되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거래은행에서 대출금을 회수해가는 바람에 돈이 안 돌게 된 것. 이때 운전자금이 부족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경쟁업체들의 흑색선전도 가세했다. 진로 본사가 망해 가므로 진로재팬은 더 이상 JINRO소주를 팔 수 없을 것이라는 모함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것이 JINRO브랜드를 지키는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한다. "당시 사방에서 모함이 들어왔습니다. 본사가 어려워지니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 정도에서 물건이 안 팔려야 합니다. 저도 그럴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수주가 더 폭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JINRO소주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된다. 있을 때 사두자'며 유통업자들이 계속 주문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에 계속적인 고성장이 가능했습니다. 그 동안 쌓아둔 브랜드 이미지 덕분이었지요."

김사장은 지난 9월 초 또 하나의 승부를 걸었다. JINRO라는 브랜드를 배경으로 소주칵테일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일본의 간토 지역을 중심으로 알콜도수 7%짜리 'JINRO캔'을 시판했는데 20일 만에 5만 상자(3백50㎖짜리 캔 24개) 이상 팔려나갔다. 소주를 탄산음료에 희석시킨 뒤 레몬맛을 첨가, 맛이 산뜻하고 깨끗해 20대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집계에 따르면 JINRO캔의 판매량은 점포당 하루 평균 3.2캔. 지금까지 1위를 지키던 산토리의 '수퍼츄하이'(하루 2.8캔)를 앞지른 것이다. 아직 한 달간의 공식판매량이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소주칵테일 중에는 1위가 확실시되고 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연말까지 약 15만 상자가 팔려나갈 전망이다. 이에 따라 그는 당초 내년의 판매목표를 30만 상자에서 50만 상자로 늘려잡았다.

성공의 비결은 역시 그 동안 쌓아온 JINRO라는 브랜드 이미지와 맛. 또 이번에도 고가정책이 먹혀들었다. 값은 캔당 1백90엔으로 수퍼츄하이(1백40엔)보다 오히려 50엔 비싸다.

"싼 값이냐, 브랜드냐의 선택에서 일본 소비자들은 JINRO라는 브랜드를 택했습니다. 이제 일본 소비자들은 JINRO가 한국상품이라는 의식없이 그저 JINRO라는 브랜드가 좋아 저희 제품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현지화에 성공한 것이지요. 또 한국상품 가운데 해외에서 고가정책으로 나가 성공한 드문 케이스라고 자부합니다."

김사장의 자신감에는 또다른 근거가 있다. 최근 소비자조사 결과 JINRO의 주고객층이 장년층에서 20, 30대 젊은 여성층으로 바뀌었다. 어떤 상품이든 젊은 여성을 주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으면 장래가 밝다며 김사장은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제는 JINRO라는 브랜드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는 브랜드 이미지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업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통신판매나 사이버마켓에 진출할 수도 있고 외식산업을 전국 체인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주류도 상당부분 직판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런 김사장도 본사의 행보가 마음 한 구석에 늘 그늘로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본사가 잘 돼야 자회사인 진로재팬도 더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공부를 잘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격이지요. 앞으로도 진로재팬은 계속 장사 잘하는데 전념할 것입니다. 또 철저히 현지화해 일본 사회에 공헌하는 일본기업으로 키울 작정입니다. 장래에는 일본의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킬 계획입니다."

김사장은 일본 습관에 익숙해서인지 한국인을 만나도 악수 대신 일본식으로 허리를 굽혀 절만 한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아이들은 일본말로 응수한다고 한다. 서울 출신이며 서울고·한양대 공대를 졸업했다.

남윤호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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