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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르네상스와 단편영화

중앙일보

입력

충무로 르네상스! 요즘 한국 영화가 사건을 만들고 있다. 우선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연말기준으로 40%를 상회할 전망이다. 시장을 개방하는 국가 중 자국 영화가 4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는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다. 80년대 중반까지 국제 영화시장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국시장의 절반까지를 지켜 왔던 프랑스도 현재는 30% 미만의 수치로 고전하고 있다. 이는 할리우드를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메이저 제작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 영화산업은 실상 극영화 부문은 거의 포기하고 애니메이션으로 겨우 체면유지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작품의 수준도 만만치 않다. 시장을 주도하는 단일장르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 영화하면 최루 멜로드라마를 연상하거나 고무신 관객을 떠올린다면 아예 북에서 내려온 간첩 취급을 받을 정도다. 액션, 코미디, 공포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혼합장르의 성격을 가지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코믹잔혹극이나 코믹통쾌극과 같이 새로운 신조어들로 포장된 이색영화들로 인해 영화장르론을 다시 써야 할 정도다.

한국 영화의 이러한 역동적 변화는 국내의 관심을 넘어서 해외언론의 주목까지 끌고 있다. 근착 미국의 시사주간지《타임》은 <처녀들의 저녁식사>
와 <거짓말>
을 소개하면서 80년대에는 스페인 영화가 도발적인 성 담론을 개성적인 영상언어로 표현했다면 지금은 한국 영화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세계 영화의 흐름을 알고싶다면 한국 영화를 주목하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기사였다.

이러한 한국 영화 대약진의 원동력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11월 중순 한 단편영화제의 심사를 맡으면서 그 원인의 하나를 기분좋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극영화 부문의 출품작 편수만 220여 편. 국내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진출했거나 한국 학생들이 유학하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 단편영화들이 밀려들었다. 출품작 편수가 예상을 뛰어넘자 주최측은 예심기간을 연장하고 영화제 개최일자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단편영화 드디어 폭발'이라고 감탄사를 쏟아냈다.

이미 영화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되어 버린 <대부>
의 명감독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지옥의 묵시록>
을 완성하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어느 날 키가 작고 뚱뚱한 소녀가 8밀리 비디오 카메라로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 때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영화는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다."

코폴라는 필리핀 정글에서의 1년이 넘는 사투와 같은 촬영 그리고 2년에 걸친 후반 작업을 마치고 기록영화의 카메라 앞에 앉아 '어린 소녀와 영화예술'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이다. "소녀가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다."라는 말은 영화가 직업적인 영화인들만의 영역에서 보통사람들의 세계로 확대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4천5백만 한국인 중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를. 한국 영화감독협회에 소속된 영화감독의 수는 1백 명이 채 안 된다. 그 중에서 현역으로 뛰는 감독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텔레비전 프로듀서까지 이 영역에 포함시켜 봐야 영상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사람은 정말 전체 한국인 중 0.01%도 되지 않는다. 이런 적은 수의 사람만이 참여하는 예술을 이 시대의 주요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시대를 영상시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문학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제는 '한물갔다'는 문자예술을 말이다. 강원도 산골마을의 어느 빈한한 가정의 건넌방에도 세계문학전집 한 권이라도 꽂혀 있고 그 농부의 어린 딸도 일기를 쓴다. 그리고 숙제일지라도 1년에 한번은 국군장병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쓴다. 일기와 서간문을 통해서 아이들도 수필문학의 창작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코폴라의 말은 바로 영화가 그렇게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창작행위를 수반할 때만 진정한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정말 영상시대라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지금 보다는 훨씬 많아져야 한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영화상품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이 되어 어두운 극장의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웃고 울기만 해서는 영상시대라는 단어는 쑥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편영화제에 밀려든 그 많은 출품작들을 보는 순간 이제 우리가 드디어 본격적인 영상시대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요즘의 단편영화는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단편영화제에는 이미 '중딩영화'나 '고딩영화'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고 있다. 바로 중학교나 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드는 영화를 가리킨다. 이미 대중확산의 단계를 넘어선 비디오카메라의 보급이 만들어낸 이 새로운 문화는 코폴라 감독이 말한 바로 '키가 작고 뚱뚱한 소녀의 영화'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요즘 이러한 단편영화의 열기와 함께 단편영화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들도 많이 생겨나 이제 그 이름들을 다 외우지 못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편영화제에 관객들이 몰리고 있다. 그래서 유수한 단편영화제들은 입장권 매진이라는 엄청난 문화적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참 좋은 일이다. 영화 하면 통속대중영화만이 주름잡던 한국의 영화문화에 이제 다원화라는 성숙의 단계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편영화가 양적으로 급성장한 원인으로는 정부의 의욕적인 영화진흥정책을 우선 꼽아야 한다. 영화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민간행정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새롭게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는 1년에 두 번 20편씩, 연간으로는 40편을 선정하여 6백만 원의 제작지원금을 제공한다.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이 공모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이다.

여기에 90년대 들어 경쟁적으로 신설된 대학 영화관련학과의 양적 팽창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80년대 말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고작 5개에 불과했던 영화 교육기관들이 지금은 무려 50여 개에 이른다. 여기에 등록하여 대학과정의 영화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만도 8천여 명이 넘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가 등록금으로 지출하는 돈만 연간 4백억 원. 이것이 바로 한국 영상산업에 대한 민간 투자비용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영상산업진흥을 위한 거대한 투자를 민관합동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수요확대정책을 펼치고 민간이 호응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인재들이 영화분야에 대거 진출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대학 영화관련 입시에는 수능성적 상위권의 학생들이 지원하여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대학 전체 입학 수석이 영화관련학과에서 나오는 일도 심심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어두운 함정과 걸리면 최소 중상인 두려운 덫들이 사방에 널려 있게 마련이다. 만사에는 逆理가 있게 마련이요 좀 좋은 일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호사다마라 하지 않는가?

필자의 이러한 걱정은 공연한 것이 아니다. 우선 단편영화제와 제작편수는 급증하고 있는데 정작 단편영화의 고유한 특징을 제대로 살린 영화는 드물다. 양적 성장은 확실히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작품의 질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편영화제들에서 그래도 우수하다고 상을 받은 작품들을 보더라도 장편용 소재를 억지로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 구겨넣은 의욕과잉이 아니면 섣부른 이국취향이거나 공연히 심각하기 일쑤인 구태의연한 60년대 사이비 실험영화의 전통을 여전히 흉내내는 작품들이 태반이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들과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드는 소위 구조적 원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에서 하나만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지만 가장 크고 치명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단편영화라는 용어가 잘못 이해되고 사용되는 것이다. 단편영화라는 단어가 과장되고 있거나 과소 평가되고 있다.

우선 단편영화는 무엇인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편영화는 단편영화다'가 그 답이다. 선문답식으로 문제를 추상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역사 백 년 동안 영화사조의 변천에 따라 단편영화의 스타일과 경향의 변화는 있어 왔지만 그 개념적 정의는 언제나 하나였다. 단편영화는 16밀리 이하의 소형영화도 아니요 난해한 실험영화도 아니다. 오직 장편영화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상영시간이 짧은 영화'가 단편영화다. 그러므로 그 짧은 상영시간에 맞는 소재를 선택해 절제와 상징의 영상언어로 작가의 생각을 필름에 담는 영화가 단편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단편영화들은 그 단편의 매력과 특성을 고찰하기 전에 엉뚱하게도 단편영화는 '독립영화(independent film 또는 줄여 indie film)
'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독립영화라는 단어는 메이저 영화사들이 시장의 90% 이상을 석권하여 비주류 영화가 발붙이기 힘든 미국의 영화인들이 만든 말이다. 또 그것은 무슨 독립투쟁하는 영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공황 시대 이후 오갈 데 없는 실업자들을 극장에 오랜 시간 잡아 두기 위해 메이저들의 일급영화와 소위 독립영화사들의 B급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할리우드 메이저들의 극장산업 장악전략의 일환으로 나온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영화인들은 할리우드 입성을 꿈꾸는 마이너리그의 견습생들임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꾸준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트 담당자들에게 발탁되는 것, 그것이 미국 인디영화인들의 꿈인 것이다. 물론 미국에도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꾸준히 영화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는 영화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인디영화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실험영화인, 순수영화인으로 자처하면서 철저하게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영화를 만들어간다.

좋은 단편영화는 제작기금 조성이나 우수영화 보상과 같은 물질적인 지원이나 단편 전문의 배급이나 상영공간의 확보를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나 정책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바르게 쓰여 합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사회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단편영화를 목표로 한다면 정말 단편이란 무엇인지 그 고유한 형식과 언어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문학청년'이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곤 했다. 대학생이라면, 젊고 패기만만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시나 소설에 인생을 승부할 결심을 하고, 연말이 되면 신문의 신춘문예 광고에 공연히 가슴이 설레던 청춘의 문화가 있었다.

요즘 한국의 대학가는 '영화청년'들로 북적거린다. 금년 초 한 대학 학생회의 초대를 받아 대형 계단식 강의실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강연을 마치자마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요즘 우리들은 영화를 공부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필자도 순간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영화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결코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강한섭/영화평론가,서울예술대학 영화과 교수
emerge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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