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새벽 - 리비아 공습] 카다피 “십자군 침공, 식민 전쟁” 규정해 이슬람권 자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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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시민군이 차지하고 있는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 인근 도로에서 연합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은 카다피 군 탱크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벵가지 로이터=뉴시스]

무아마르 카다피(사진) 리비아 최고지도자는 18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통과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렸다. 서방이 리비아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그의 몰락이 눈앞에 온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노회한 술수를 구사했다. 이날 연합군의 군사행동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카다피는 곧바로 시민군과의 휴전을 선언했다. 연합군 측의 추가 대응이 잠시 주춤해졌고 사태는 소강 국면에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날 오전 카다피는 기습 공격으로 벵가지 탈환에 나섰다. 서방의 눈을 잠시 가린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다. 카다피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연합군 측은 부랴부랴 국제회의를 소집해 공격을 결정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인 42년째 집권 중인 카다피의 노회함은 전술에서 선전전에 이르는 연합군과의 전략게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연합군의 공습 직후 리비아 국영TV는 “트리폴리의 민간 시설이 십자군 적(crusader enemy) 전투기들에 폭격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십자군’이란 키워드를 끄집어내 서방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권 반감의 뿌리를 자극한 것이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도 건드렸다. 그는 이날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노골적인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라며 “이번 사태는 지중해와 유럽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군의 공습을 ‘식민전쟁’으로 규정해 식민지의 아픈 기억이 있는 아프리카 지역의 민심을 건드리려는 포석이다. 카다피의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다. 연합군은 군사작전에 아랍권의 동참을 요청했지만 아랍 국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아프리카 53개국이 회원국인 아프리카연합(AU)은 20일 회의를 열고 연합군의 리비아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중국·러시아 등 우군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유엔도 카다피가 서방 측 전선을 흐트릴 수단이다. 리비아 정부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자신들의 휴전 이행 여부를 감시해 달라며 유엔의 직접 개입을 요구했고, 동시에 우호국들의 지지를 요청했다. 중국과 러시아 외교부는 이날 연합군의 공격에 유감을 표명했다. 리비아 내전 내내 카다피가 ‘알카에다의 소행’임을 주장해 온 것도 서방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자신에 대한 공세를 누그러트리려는 의도로 분석됐다.

 카다피는 또 피해자임을 강조해 대내외의 군사적 결집을 노리고 있다. 리비아 정부는 내내 병원 등 민간시설이 공격당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부상했다고 주장했다. 국내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군사시설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았다.

 카다피는 또 “국가 수호에 나선 국민의 무장을 돕고자 무기고를 개방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지지자들의 규합을 노린 선전술이다. 카다피 관저와 공항, 군사시설 등엔 이날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그들(연합군)의 공격에서 지도자를 지키겠다”고 외쳤다. 선전전이 목적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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