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6)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4

말굽: 나도 뭐, 자네한테 가고 싶어 간 것은 아니야.
나: <목소리가 높아지며> 네 뜻이 아니다?
말굽: 오랫동안…… 내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네. 부대장이 예편한 다음부터지. 군대를 떠난 그는 한동안 공황상태라고나 할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더니 곧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대응하기 시작했어.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폭력을 행사할 일이 설령 생겨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거든. 이른바 합법을 가장해서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자고 생각한 거야. 법에 걸리는 폭력을 휘두르는 건 오히려 순진한 짓이야. 합법적인 폭력이 더 좋은 전술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지. 세상에 나와 보니까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온통 똘마니들뿐이라는 걸 보고 느꼈던 거야. 당연히, 나는 할 일이 없어졌네. 주머니에 넣어져 선반에 올라가 있었네. 갑갑해서 미치겠더군. 그가 간과한 것은 이미 내가 나만의 고유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였어. 욕망은 피를 마시고 자라. 생피면 효과가 배가(倍加)되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단독자로서의 욕망을 가진 이상하고 이상한 생물이 됐네. 나는 피를 원했어.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지.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그의 전투화를 뚫고 나와 세상으로 걸어갈 수는 없었어. 그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야.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네. 그가 나를 선반에서 내려줄 날을. 나를 불러주기를.

나: 죽을 수는 없었고?
말굽: 나를 봐. 강철이야. <히잇, 웃고 나서> 자네 같은 사람도 그 폭력 속에서 살아남았는데, 용광로에 내던지면 모를까, 내가 선반 위에서 어떻게 죽어?
나: 용광로라, <이내 한 옥타브 치고 올라간 목소리로> 헛, 좋은 정보야.
말굽: 용광로로 들어간다고 해도 나 혼자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 너무 좋아하진 마. 암튼 오랜 세월 나는 선반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어. 지지난 겨울이었던가? 문화궁 공사 중지 명령을 받은 직후였을 걸세. 울화가 났겠지. 시장이랑 관계기관에서 뒷돈은 뒷돈대로 몽땅 받아먹고 오리발 내민 격이었으니까. 그가 혼자 명안전에 앉아 있었네. 깊은 밤이었지. 어떤 순간부터 그가 자꾸 나를 올려다보았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지.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뭐랄까, 특수부대장으로 매일 쪼인트를 까던, 좋았던 시절의 살기를 보았거든. 뒷돈 먹고 오리발 내민 시장이나 기타 관련자들을 당장이라도 쫓아가 박살내려는 눈빛이었지.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난 생각했네. 과연 선반 위의 나를 그가 당신 앞으로 내려놓았어. 주머니도 벗기고, 신발에 앉은 먼지도 세세히 닦더군. 가슴이 더욱더 부풀어올랐지. 너무도 오래 이런 날을 기다려왔으니까. 그가 마침내 신발을 신고 끈을 조여 맸을 때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네. 나는 타는 목마름으로, 시장이든 누구든, 목뼈에 파고들어, 그 피로 내 온몸을 적실 황홀한 순간을 상상했어. 그가 휘둘러주기만 한다면 그게 누구든, 갈빗대를 부서뜨리고 심장까지 단번에 들어가 박힐 수 있을 만한 욕망이었네. 그는 신발끈을 졸라맸어. 그러나 곧장 밖으로 나가질 않고 방 안을 몇 바퀴나 도는 것이었어. 점차 불안해지더군. 그의 몸무게를 견디면서, 나는 그가 많이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 달려 나가 피를 볼 것인가, 한 번 더 참아 넘기고 다음 찬스를 기다릴 것인가 하는 선택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던 게야. 그날 밤의 그는 절대 고아처럼 고독해 보였어.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고독했었네. 고독은 폭력을 불러. 남을 해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라도 해치거든. 불안한 예감은 결국 적중했지. 내가 나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게 바로 그날 밤이었으니까. 나의 주인에게서 영원히 버림받은 날이.

나: 다시 주머니에 넣어져 선반 위로 올라갔다?
말굽: <진저리를 한번 치더니> 아냐. 한마디로, 화형(火刑)이었어. 그가 갑자기 명안전 뒤뜰로 달려 나갔네.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내가 장착된 전투화를 벗어놓고 기름을 붓더니 불을 지른 거야. 충격적이었네. 그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히 그는 전투화를 신고 달려 나가고 싶어 했어. 죽여도 좋은 쓰레기들은 널려 있는 세상이거든. 고혹적인 손짓이었을 테지. 동시에 자기파멸의 강열한 유혹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 안에 깃든 폭력에의 유혹들을 뿌리째 화형에 처하는 쪽을 선택한 거야. 그로선 그게 살아남는 길이었을 테지만, 내게 그 선택은 죽음의 길이었어. 나는 뜨거운 줄도 몰랐네. 전투화의 가죽은 불타 없어지고 나만 벌거숭이로 남았지. 뼈가 시렸어. 그는 전투화가 다 타버리고 나자 휑하니 명안전으로 다시 들어갔고, 몸통을 잃은 나는 뜰에 남았네. 아무도 길에 버려진 쇳조각 따위에 주목하지 않았지. 가을은 나날이 깊어졌고, 낙엽이 벌거숭이 내 몸을 덮어주더군. 나의 주인은 그후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어. 사람들이 무심히 나를 밟고 지나다녔지. 죽을 방법만 있었다면 그때 죽었을 거야. 목마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버림받은 고독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겠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누가 됐든 상관없었어. 나를 부르는 새 주인만 있다면 나는 지옥이라도 달려갔을 거야. 나를 원하는, 나를 부르는 그 누군가가 내겐 정말 절실했었다고. 자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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