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8) 위기와 재난에 대처하는 골퍼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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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지난 2월 22일 뉴질랜드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 전지훈련 왔다가 비 때문에 집에 머물고 있던 프로 골퍼 강욱순은 ‘쾅’ 하는 굉음에 벌떡 일어섰다. 땅이 춤을 추면서 집이 흔들리고 TV 수상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무작정 바깥으로 뛰어나가지 않았다. “나가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으며, 목조 건물이라 혹시 집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나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가스를 잠그고 머리를 감싼 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피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두 시간 후 강욱순이 시내로 나가는 길에 다시 한번 땅이 요동쳤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도로에서 자동차들은 영화에서처럼 연쇄 사고를 냈다. 그러나 강욱순은 핸들을 움켜쥔 채 속도를 줄이고 침착하게 갓길에 차를 대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16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크라이스트처치 지진에서 강욱순은 무사히 빠져나와 새로운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커다란 피해가 생겼다. 거대한 재난이 일어나면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인생뿐 아니라 골프 코스에서도 종종 재앙이 생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떻게 스윙을 하는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가거나 짧은 퍼트를 앞에 두고 몸이 얼음처럼 굳는 경우도 흔하다. 잘 친 샷이 이상하게 튀어 깊은 벙커에 빠지는 등의 불운이 연거푸 생길 때도 있다. 경기를 포기하고 무너지는 지름길이다.

이런 재난 상황에 가장 잘 대처한 선수로 잭 니클라우스(사진)가 꼽힌다. 독일계 미국인인 그는 게르만족 특유의 냉정함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전 홀에서 더블보기나 트리플보기를 해도 다음 홀에서는 원래 계획한 클럽으로, 정했던 장소로 샷을 날렸다. 반면 그의 라이벌이었던 아널드 파머는 상대가 버디를 해 앞서 나가거나 자신이 보기를 범해 처지게 되면 다음 홀에선 이를 만회하려고 드라이버를 세게 치다가 큰 수렁 속에 빠지곤 했다.

니클라우스는 “나의 운과 상대의 실력 등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흘러가든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계획대로 경기를 하다 보면 전세를 바꿀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만약 니클라우스와 파머의 위기 대처 방법이 반대였다면 메이저 대회 최다승(18승)의 주인공은 니클라우스가 아니라 파머가 됐을 것이다.

대지진을 당한 일본의 위기 대처는 경이롭다. 지진과 원전 폭발 등은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이후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니클라우스의 경기를 보는 것 같다.

몇 년 전 아이즈 반다이 골프장 등 일본 후쿠시마의 골프 코스에 다녀온 기억이 있다. 600m 고지에 위치해 이나와시로 호수를 내려다보는 골프장은 매우 아름다웠다. 후쿠시마의 산세는 한국의 강원도와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가능하면 다시 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지난 2월 지진에 얻어맞은 크라이스트처치 골프 클럽은 8개 홀의 땅이 갈라지고 클럽하우스가 무너졌다. 그러나 이 클럽의 매니저 스트란 케인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가치 있는 트로피들과 밥 찰스 경의 기념품, 컴퓨터의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 138년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고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골프 클럽은 복구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페어웨이와 클럽하우스에 생긴 상처를 보듬고 더욱 단단한 골프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인간의 역사가 그렇듯 골프 코스에서도 수많은 도전과 응전이 이뤄진다. 많은 골프 코스가 전쟁과 재난에 무너졌다가 다시 살아났다.

늙고 활력이 없어 보였던 일본이 지진 재건 작업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찾아 한국과 건강한 라이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 동북부 지역의 골프장들도 다시 아름답게 부활했으면 좋겠다. 강욱순은 “한 라운드에서 반드시 두세 번은 위기를 맞게 되는데 잘 극복하면 오히려 기회가 된다. 큰 어려움도 막아냈는데 작은 어려움 정도는 너끈히 이겨낼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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