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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불법 도청된 내용 보도 정당성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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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용훈 대법원장

“만약 피고인 행위가 정당행위로 허용된다면 장차 국가기관 등이 불법 감청·녹음을 해 언론기관에 공개하더라도 이를 막을 도리가 없게 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7일 국가정보원(옛 국가안전기획부)이 불법 도청한 내용을 보도한 혐의(통신비밀보호법 위반)로 기소된 MBC 이상호(43) 기자와 김연광(49) 전 월간조선 편집장(현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에게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유예한 원심을 확정했다.

 전원합의체 재판장인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날 불법 도청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그 기준으로 “보도 목적이 불법 감청·녹음 등 범죄 사실 자체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거나, 공개하지 않으면 공중의 생명과 신체 등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큰 경우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어 “불법 감청한 결과물을 언론사가 입수할 때 위법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적극적·주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테러 계획이나 범죄 모의와 관련한 도청 등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불법 도청 내용의 공개에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기준을 근거로 이 대법원장은 “이 기자의 보도는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을 고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대화 내용을 공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도청 자료 입수 과정에서 취재 사례비 명목으로 1000달러를 지급하면서 추가로 1만 달러를 주겠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그 내용을 공개할 목적으로 자료 취득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대법원장은 특히 “만약 피고인의 행위가 정당행위로 허용된다면 장차 국가기관 등이 개인 간의 통신이나 대화를 불법 감청·녹음한 후 자신의 목적에 맞는 자료를 골라 언론기관 등을 통해 그 내용을 공개하더라도 사실상 이를 막을 도리가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대법원장 등 8명이 유죄를 인정했다.

 반면 박시환 대법관 등 5명은 무죄 취지의 소수 의견을 통해 “보도를 통해 공개되는 통신 비밀의 내용이 중대한 공공 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인정되고, 언론기관이 위법한 방법에 의해 입수하지 않았으며, 보도 방법도 공적 관심사항의 범위에 한정되는 등의 경우에는 처벌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언론 자유도 중요하지만 통신비밀 보호가 더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이 기자에게는 무죄, 김 전 편집장은 유죄를 선고했었다. 2심 재판부는 “도청된 테이프임을 알고도 대화 내용을 실명 보도한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며 두 사람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이 기자는 안기부의 도청 조직인 ‘미림팀’ 직원들이 1997년 당시 불법 도청해 만든 테이프를 입수해 2005년 7월 보도한 혐의로, 김 전 편집장은 이후 녹취록 전문을 보도한 혐의로 각각 불구속기소됐다.

조강수 기자

◆선고유예=법원이 유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형의 선고를 2년간 미뤄주는 것. 하지만 유예기간 중 자격정지 이상의 형에 처해질 경우 유예된 형이 다시 선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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