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시간이 만든 풍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21면

혹시 ‘드라이 에이징(Dry Aging)’ 스테이크를 아시는지. 그렇다면 당신은 스테이크에 관한 한 트렌드 세터다. 드라이 에이징은 요즘 국내 스테이크 업계의 단연 화두다.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는 말 그대로 ‘말리며 숙성한 스테이크’다. 기존 스테이크는 비닐 팩으로 진공 포장해 숙성하는 ‘웻 에이징(Wet Aging)’이었다. 반면 드라이 에이징은 포장을 아예 안 하고 공기 중에서 그대로 말린다. 말라가며 숙성되면, 딱딱하게 마른 겉면은 도려내고 속살만 구워 먹는다. 그러니까 여태 우리가 먹은 모든 종류의 스테이크는 웻 에이징 방식으로 숙성한 고기였다. 2008년부터 서울 이태원과 청담동 등지에 하나 둘씩 생겨난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하우스는 어느새 스테이크 매니어라면 한번쯤 다녀와야 할 핫 플레이스가 됐다.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의 세계를 알아봤다.

글=이상은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 1960년대 이전엔 유일한 숙성법

꾸덕꾸덕, 거무스름해질 때까지 말려야 탄생하는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온도와 습도를 까다롭게 맞춰 놓은 저장고 속엔 고기가 들어간 날짜와 나올 날짜도 적혀 있다.


국내에서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를 찾는 손님은 크게 두 부류다. 서양문화권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과 호기심 많은 사람. 스테이크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한국에선 생소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선 오히려 드라이 에이징이 전통 숙성 방식이다. 1960년대 진공포장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건조 숙성만이 유일한 숙성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고기의 손실을 줄이는 진공포장법의 탄생은 육가공업자에게 반가운 소식이었고, 80년대엔 전 세계 고기 유통량의 90% 이상이 진공포장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자취를 감추는 듯했던 드라이 에이징 방식은 90년대 후반부터 미국 중부와 동부에서 향수를 타고 부활했다. 국내엔 2008년 서울 이태원의 ‘이사벨 더 부처’가 들어선 이래 지금까지 7개 정도의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하우스가 생겼다. 주로 이태원과 청담동, 신사동에 자리하고 있다.

# 꽃미남의 매력 VS 짐승남의 매력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의 가장 큰 매력은 농축된 진한 맛이다. 물오징어보다 말린 오징어에서, 생고기보다 육포에서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마르는 과정에서 고깃덩어리 겉면의 수분이 날아가는 대신 안으로 맛이 응축된다. 호기심에 처음 찾은 손님의 반응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일종의 중독 현상. 그 진한 맛에 매료돼 “일반 스테이크는 싱겁게 느껴진다”며 계속 드라이 에이징을 찾는 것이다. 반면 부담스러워 꺼리는 사람도 있다. 오래 묵은 김치나 진한 블루 치즈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와 같다. 서울 신사동 ‘구 스테이크528’의 김현석(46) 사장은 “촉촉하고 부담 없는 맛은 웻 에이징이 낫기 때문에 손님 중 40%는 여전히 웻 에이징을 찾는다”고 말한다. 신사동 ‘더반’의 노종헌(43) 셰프는 “웻 에이징 스테이크가 꽃미남이라면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는 짐승남”이라며 “짐승남의 강한 매력에 중독되면 평범한 남자는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 숙성기간 10일~40일

‘클락 식스틴’에선 한 접시에 드라이 에이징(사진 오른쪽)과 웻 에이징 스테이크가 함께 나온다. 드라이 에이징의 진한 맛과 웻 에이징의 부담 없고 촉촉한 맛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말리면서 숙성시키는 것이 드라이 에이징이라지만 무조건 말리기만 해선 안 된다. 드라이 에이징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숙성기간, 저장온도, 상대습도,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다. 정답은 없다. 저마다 무수한 고기를 버리고 나서야 최적의 조건을 찾아낸다. 전용 저장고는 필수다.

 국내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 하우스의 숙성기간은 최소 10일, 최대 40일이다. 저장 온도는 영상 1~2도. 영하로 내려가면 고기가 얼어 숙성이 중단되고 온도를 너무 높이면 고기가 쉬어버린다. 습도는 75~85도가 적절하다. 습도가 낮으면 육포처럼 바싹 말라버리고, 높으면 곰팡이가 핀다. 공기의 흐름도 중요하다. 골고루 바람을 쐬어야 골고루 마른다. 그래서 고기의 위치와 방향을 매일 바꿔주고 따로 선풍기를 틀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얻은 스테이크 양은 처음 생고기 상태의 40~70%다. 마르는 동안 크기가 줄어들고, 다 마른 고기의 겉면은 도려낸 뒤 속살만 구워 먹기 때문이다.

 현저히 줄어드는 고기의 양과 보관에 드는 수고 때문에 가격은 일반 스테이크보다 1.5배쯤 비싸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8억 명 이상이 영양실조라는 현실을 떠올리면, 고기를 일부러 말려 도려낸 뒤 비싼 값에 속살만 먹는 이 방식은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고, 국내에서도 드라이 에이징이 인기를 끈다는 건 그만큼 미식 트렌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