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닮았나 … 재난에 강한 엔화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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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으로 알려진 경제부처의 한 관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본 대지진에 엔화가치가 떨어졌다가 다시 반등했기 때문이다. 통화가치는 일반적으로 해당 국가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경제가 튼튼하고 잘나가야 통화의 힘도 세진다. 그런데 막대한 지진 피해를 본 일본의 엔화가 왜 반등했을까. 마치 엔화는 침착하고 준비된 지진 대처로 세계인을 탄복하게 한 일본인을 빼닮은 것 같다.

지난 11일 지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엔화가 급락한 것은 국제금융시장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돈은 달러와 금같은 안전자산으로 흐른다. 이렇게 되면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 특히 이머징 국가의 통화는 약세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달러 대비 엔화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엔화는 예상외로 곧 반등했다. 해석은 다양하다.

 첫째, 대지진의 영향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시각이다. 국제금융센터는 13일 보고서에서 “이번 사태로 국제금융시장 전반의 위험회피 성향이 커질 것이나 그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도 “국제금융시장이 일본 지진의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국내총생산(GDP)의 2.5%에 달하는 1400억 달러의 피해를 봤지만 그해 1분기의 전년 동기 대비 경제성장률은 3.4%로 94년 4분기의 2.7%보다 높았다”고 말했다.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들도 대체로 이에 공감한다. 투자은행 BNP파리바는 “글로벌 경제의 회복세를 꺾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도 “일본 경제가 지진 피해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용등급에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둘째, 재해 복구 등으로 당장 쓸 돈이 급해진 일본 투자자들이 해외투자금을 거둬들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 현지 통화를 팔고 엔화를 사야 하니까 엔화 값이 세진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위원은 “지진 복구자금과 보험 보상금 지급 등으로 일본 정부와 기업이 대량의 자금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단기적으로 엔화가치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박상순 파트너도 “엔화 반등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피해 복구를 위한 해외투자금이 본국으로 환류할 가능성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에 투자된 엔화 자금의 본국 환류가 본격화할 경우 한국 금융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재정부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일본계 포트폴리오 자금은 현재 국내 주식 6조원어치를 들고 있으며 채권 투자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셋째, 95년 고베 대지진의 학습효과다. 당시 엔화가치는 지진 이후 석 달간 18%가량 올랐다.

 하지만 엔화 반등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과거 고베 지진 때도 엔화는 달러화 대비 단기적으로 강세를 보였으나 석 달 후에는 다시 약세로 전환됐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12일 엔화 강세가 계속 이어지기 힘들다고 분석했다. 대지진이 원전 사고로 확대되면서 안전자산으로서의 엔화의 장점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WSJ는 복구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수조 달러 규모의 국채를 발행할 것인 만큼 채권시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봤다. 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도 “지진 복구비용으로 GDP의 2~3%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며, 이럴 경우 재정적자가 심화돼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오재열 IBK투자전략팀장은 “엔화 강세가 오래 지속될 가능성은 작다”며 “일본 정부의 재정 고갈 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경호·하현옥·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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