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고베 대지진, 무라야마 내각의 ‘단명’ 계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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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에선 이번 도호쿠 지진 이전에도 규모 8 안팎의 대지진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동반하는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는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고 정치·사회적 변동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대지진은 1995년 1월 간사이 지방을 덮친 고베 대지진이다. 규모는 7.3이었지만 대도시 주변에서 발생해 6436명이라는 큰 인명피해를 냈다. 이 대지진은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를 중심으로 한 사회당과 자민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정권이 조기 붕괴하는 원인이 됐다. 당시 무라야마 내각은 위기관리 기능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 비상재해대책본부가 꾸려진 것은 지진 발생 6시간 뒤였고 긴급대책 발표는 하루 이상이 더 걸렸다. 정부가 허둥대다 보니 구조와 대책이 지연돼 피해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해 무라야마 내각의 지지율은 추락했고 사회당 출신으로 첫 총리가 된 무라야마는 이듬해 스스로 총리직을 내놓았다. 일본은 고베 대지진의 교훈을 살려 국내 지진 정보를 24시간 수집할 수 있는 위기관리 체제를 정비했다. 그래서 2008년 이와테·미야자키 내륙지진 때는 발생 후 7분 만에 총리관저에 대책실이 마련됐다.

한국인의 뇌리에 가장 깊이 각인돼 있는 지진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규모 7.9)이다. 사망과 행방불명을 합해 10만5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사상 최악의 재해다. 인명 피해의 상당 부분은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주방에서 취사도구를 사용하던 시간에 지진이 일어나 때마침 들어온 강풍을 타고 도쿄 주택가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당시 일본의 서민 주택은 대부분 목조가옥이었다. 사흘 만에 불길이 잡혔지만 도쿄의 관청가 일부와 서민 주택가는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인심이 흉악해지면서 조선인에 대한 학살극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지진을 틈타 불만세력인 조선인들이 고의로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도쿄 일원에 퍼졌고 이를 믿은 일본인들이 수천 명의 조선인을 비롯해 대만인·오키나와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이 학살 사건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 간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1896년에는 이번 지진이 일어난 곳과 같은 지역에서 규모 7.2의 메이지산리쿠(明治三陸) 지진이 발생해 2만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최고 38.2m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33년에도 거의 같은 위치에서 규모 8.4의 쇼와산리쿠(昭和三陸) 지진으로 3000여 명이 숨졌다.

일본에서 근대적인 지진 관측이 시작된 1884년 이전에도 피해가 큰 지진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도쿠가와(德川) 막부 후기인 1855년에 발생한 안세이(安政) 대지진이 유명하다. 당시 막부 소재지였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일원에 규모 6.9의 지진이 일어나 가옥 1만 채가 무너지거나 불타고 4300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지진 뒤의 복구 사업으로 한때 경기가 좋아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무렵엔 대지진이 유례없이 잇따라 일어나는 바람에 사회적 동요가 가속화됐다. 1854년엔 규모 8.4의 도카이 지진 및 도난카이 지진이 하루 간격으로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에 대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됐다. 이런 민심 이반은 서양 함선의 출몰과 더불어 도쿠가와 막부 타도 운동이 활발해지는 시대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 막부 타도 운동은 10여 년 뒤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예영준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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