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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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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편지는 사랑이다. 유치환의 ‘행복’은 우체국에서 시작한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운을 뗀다.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는’ 것이 편지다. ‘부모님전상서’도 비록 ‘향토장학금’이 목적이겠지만, 부자유친(父子有親) 사랑이 배어 있다.

 사랑의 편지는 기다림이다. 정호승은 ‘또 기다리는 편지’에서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고 했다. 황동규도 ‘즐거운 편지’에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고 했다.

 천리 밖 소식도 그럴진대, 다가갈 수 없는 옥(獄)이나 유배지 편지는 사랑이 더욱 진하다. 승화된 사랑이랄까. 『신약성서』의 바탕이 된 바울의 편지 14통 가운데 4통(에베소·빌립보·골로새·빌레몬서)이 옥중서신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교리와 기독교인의 생활자세가 정립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청주교도소에서 편지를 썼다.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안부와 인문·사회·정치·경제까지 적은 ‘손바닥 편지’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중 한(恨)과 고뇌를 적은 편지가 바탕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 역시 두 아들과 형 약전(若銓), 제자를 향한 사랑이 절절하다. “폐족(廢族)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독서밖에 없다”며 아들에게 “세상을 구했던 책을 읽으라”고 당부한다.

 그런가 하면 장난 편지도 있다. ‘행운의 편지’가 대표적이다.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돼…다른 사람에게 7통을 보내면 행운이 온다”는 내용이다. “이를 외면한 케네디는 암살됐다”고 협박하는 사실상 ‘저주의 편지’다.

 편지는 죽어서도 보낸다. 1997년 영화 ‘편지’에서 주인공(최진실 분)에게 저세상의 남편(박신양 분)으로부터 편지가 온다. 뇌종양으로 죽기 전 미리 쓴 것이지만, 아내에겐 ‘천국에서 온 편지’인 셈이다.

 자살한 연예인 장자연씨가 생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편지가 뒤늦게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31명의 악마’에게 “복수해 달라”며 피를 토하는 내용이다. 사랑은 없고, 분노와 비탄만이 가득하다. 이를 접한 31명에겐 ‘지옥에서 온 편지’쯤이 아닐까.

박종권 선임기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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