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8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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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단식, 개안수련 12

말굽의 컨디션은 최고조였다. 벌써 독이 잔뜩 오른 말굽이 생생히 느껴졌다. 말굽의 유일한 인정주의는 제 힘을 창끝보다 더 예리하게 모아 대상을 가급적 단 한 번에, 단호하고 깔끔하게 쪼개는 것이었다. 망설이거나 하진 않았다. 나의 말굽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먼저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다음에 다른 한 손으로 힘차게 말을 달렸다. 그녀의 두개골은 상한 생선의 비늘처럼 연약했다. 그러나 옹골차게 지켜온 목숨이었다. 뇌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느꼈지만, 살아온 관성을 좇아 버르적거렸기 때문에, 나는 여러 번 내려쳐야 했으며, 한참이나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강력하게 틀어잡고 있어야 했다. 쏟아져 나온 뇌수가 무절제하게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녀가 잠잠해진 다음, 나는 손바닥에 묻은 뇌수를 커튼에 조용히 닦았다.

찾아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찾기 위해 조용히 그 방을 나오려고 했다. 예정대로라면 그게 순서였다. 그런데 말굽이 문제였다. 흥분이 고조된 말굽은 나와 다른 의지를 갖고 움직였다. 그 바람에 내가 조금 당황했었는지도 몰랐다. 돌아서다가 비틀, 하면서 옆의 침대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다른 사람의 머리가 손바닥을 스쳤다. 중증 장애자인 것 같았다. 그가 부시럭거리면서 깨어 일어나고 있었다. 불씨에다가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말굽의 에너지가 단연코 증폭됐다. 손바닥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말굽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되는 걸 느꼈다. 나는 그냥 방을 나가라고 내게 명령하고 있었으나, 몸의 일부는 이미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아니 일부가 아니라 곧 내 몸의 전 영토가 말굽의 지배 아래 놓일 기세였다. 말굽은 포악한 점령군이나 다름없었다. 히잉, 하고 날뛰며 내는 말굽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파죽지세로 전진하라는 일종의 진군나팔소리였다. 내 손바닥이 돌연 미친 듯 춤추기 시작했다. 이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를 완전히 장악한, 말굽의 강력한 발작이 아닐 수 없었다. 네 개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던 나머지 사람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은 일이 다 마무리된 후였다. 두개골은 물론이고 늑골들이 주저앉아 심장의 일부가 튀어나온 이도 있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두개골이 열린 채 벌떡 일어섰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신발 끝이 뇌수로 흥건해졌다.

놀랍거나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다.
말굽이 나의 주인이 되리라는 예감은 벌써부터 느껴오던 참이었다. 뇌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통증은 없었을 터였다. 커튼을 북 뜯어내어 손바닥과 신발을 꼼꼼히 닦았다. 말굽이 보였다. 방자해진 말굽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제 집 밖으로 솟아나와 있었다. 양손에서, 손바닥 가죽을 밀고 올라온 말굽이 똑똑히 보였다. 쌔액쌔액, 백 미터 달리기를 막 끝낸 어린아이처럼, 말굽은 귀엽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헤드랜턴을 손바닥에 대고 나의 말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말굽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라는 말이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오른손 손바닥을 차지한 말굽과 왼손 손바닥을 차지한 말굽의 모양이 조금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른손 말굽은 구두뒤축처럼 원만히 굽었으나 왼손의 말굽은 굽은 지점에 톱날들이 달려 있었다. 톱날이라기보다 아주 작은 창날이 둘러쳐져 있는 형태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고 느낀 것은 그때였다.
나는 누구? 하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나의 말굽이 있으므로 두려울 건 전혀 없었다. 두렵기는커녕 말굽이 나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고 하는 게 옳을 터였다. 뜻밖이었다. 현관 쪽의 복도 끝에 그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제부터 찾아 나서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방문객이 왔다는 낌새를 채고 복도로 걸어 나올 만큼 예민한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주방 불이 켜져 있었다.
소년처럼 키가 작은 남자였다.
딸을 돌려달라고 피켓을 들고 있을 때보다 키가 한 뼘 이상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는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정을 박을 때나 쓰는 쇠망치였다. 망치를 든 팔과 어깨가 그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축 쳐져 있어 그는 마치 불구자 같았다. 나는 쳐진 그의 팔을 보고, 망치를 보고, 망치 끝을 보았다. 피고름인가, 검붉은 점액이 뚝, 뚝, 망치 끝에서 떨어졌다.

“아저씨가 내 방에 들렀다 나가는 걸 보았어요.”
그는 아마 내가 들른 첫 번째 방에 있었던가 보았다.
“갑자기…… 힘이 났어요. 그 자는 아마…… 내 머리를 주먹으로…… 삼…… 삼천 번은 쳤을 거예요. 망치를 사용했지만, 나는 뭐…… 다섯 번도 치지 않았다고요. 여기 원장요. 혼자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시고…… 초저녁부터 쓰러져 잠들었거든요. 아저씨가 오기 전에 이미 망치는 찾아두었지만요, 내가 쓰기에 너무 무거운 망치라서…… 그, 그냥 누워 있었는데, 아저씨가 들어왔다 나가는 걸 봤어요. 나를 구하려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지요. 그러니까 막 힘이 나대요. 용감해지도록…… 도와줘 고마워요. 이과장까지 함께…… 처단할 수 없어서 좀 아쉽지만요.”
“…….”
그가 나의 말굽처럼 귀엽게, 가쁜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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