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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3]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1

미주중앙

입력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일본 영사관도 안가

우리 한민족을 은근과 끈기가 있는 민족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참고 견디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4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도 은근과 끈기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사람을 좋아해도 은근히 좋아하고 오래 좋아한다. 그래서 좋은 것도 겉으로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은근히 싫어하고 끝까지 미워한다.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이 일본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한 것도 그런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조국이 남의 나라가 됐다 하더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다. 지배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 해도 고향산천은 내 것이기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미워서 가질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일본 간장 구입도 안해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이순도 할머니의 설명이다.

"한국을 가고 싶어도 일본 영사관에 가서 수속을 해야 하니까 그것을 꺼려했습니다. 일본사람들 한테 가서 구구하게 하는 것은 싫다는 거예요 뭐든지. 우리는 이민 올적에 당당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왔는데 왜 그걸 가지고 거기에 가서 굴해야 하느냐 그래서 못 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구의 반대편에 가서도 김치를 찾는다. 콩이 없는 곳에 가서도 간장 된장을 찾는다. 미국이 넓은 나라이지만 간장이나 된장을 구하기란 힘든 일이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싫어한다. 그래서 더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은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다. 그러나 왠지 일본사람들에게서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은근히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맛이 없어도 청국(중국) 간장을 사서 먹었다.

◇일본인 구타하며 분풀이

일본이 내 조국을 빼앗았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미웠다. 힘이 없어서 당장 조국을 독립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혼을 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 중에서 아니꼬운 녀석이 있으면 한번씩 때렸다.

초기 아메리카 한인 이민의 상당수가 해산된 광무군(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실력이 있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무술을 익혔던 것이다. 그 실력이 발휘되고 있었다.

양주은 옹의 주장이다.

"일본사람들이 그때 시절에는 원수니까 일본사람과 맞부딪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막 조져댔거든.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 사람을 잘 친다면서 그 사람들과 맞서지 말라고 저희들끼리 권고하고 주의를 주고 그랬단 말이야. 왜 그러냐 하면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서울에서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택견을 하는 거야. 두발로 이마를 차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일본사람을 치면 한사람이 일본사람 열 스물을 쳐.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아이고 한국사람 말도 말라고 사람 잘 친다고.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한테 달려들지를 못했어."

일본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멕시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의 한국인들은 보다 대담하게 행동했다.

◇멕시코 일본대사 구타사건

어느 날인가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노동자들을 갑자기 집합시켰다. 그리고 멕시코 경찰이 어떤 동양 사람을 소개했다. 그 다음 얘기는 티후아나의 김경우씨로부터 들어본다.

"멕시코 경찰이 발표를 하는데 일본대사가 왔다. 이름은 누군지 모릅니다. 왔는데 너희 한국사람들한테 할말이 있어서 모인 것이라고 그렇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한국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사람들을 증오하는 마음이 꽉 들어 차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일본 대사가 왔다 그러니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돼 있었겠죠. 그런데 일본 대사가 단위에 올라가서 얘기를 하는데 멕시코 사람이 통역을 했다고 그래요. 그 통역 얘기를 들으니까 이제 한국사람은 일본 사람이 됐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합해서 한국 땅이 일본 땅이 됐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일본사람 치하에서 일본 국민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멕시코에 온 대사니까 앞으로는 당신들의 모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그러자 그 자리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분이 넘쳐 가지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다가 단에 올라가서 일본대사를 구타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이 구속된 것은 물론이다.

◇대한제국 언어 그대로 사용

동포 1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말을 몰라서 대화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단어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출발한 시기가 1세기 전이어서 언어의 시대 차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사람들에게 나라는 빼앗겼지만 나는 고종황제를 모셨던 한민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 잊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지켜왔다고 해야 옳다.

피곤했지만 밤이면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쳤다. 한국어를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지금 너의 조국은 일본 놈들이 다스리고 있다'고 가르쳤다. '일본 놈들이 한국말을 없애려고 한다'는 얘기도 가르쳤다. '그래서 너의 조국은 일본말을 쓰고 있을 것이다'고 가르쳤다. '아직 한국말이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순수한 한국말은 아닐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고국을 떠났던 1900년대 초 고종황제 때 쓰고 있었던 말들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살아갔다.

1947년에 미국에 건너온 전 하와이대학교 이상억 교수의 얘기다.

"수병이라고 하면 모릅니다. 물 병정이라고 해야하고요 또 공장은 기계창 이라고 하고요 소방서하면 그것은 불 기계창이 되고요 순경은 순사고요 비행기는 공기선이 되고요 변소는 뒷간이라야 되고 또 레코드 판을 유성기 판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레코드판을 틀었더니 '왜 일본 음악을 트느냐?' 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기들이 떠날 때는 그런 신식 유행가가 없었고 그후에 나타났으니까 그분들은 그것을 일본 음악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 음악 틀지 말라고 아주 좋지 않은 기분으로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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