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정주영 회장 도왔다고 처벌할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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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최현철
경제부문 기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72년 선박 수주를 위해 해외 출장을 갔다. 변변한 조선소 하나 없는 한국의 능력을 의심하는 선주와 은행들에 그는 조선소가 들어설 해변의 지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보여주며 설득했다. 결국 그는 수주와 자금 차입에 성공했고 2년반 만에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해냈다. 우리 조선업은 이렇게 맨땅에서 자신과 열정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돈을 빌려준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 담당자는 징계감이다. 적어도 지난주 감사원이 발표한 무역보험공사의 중소 조선사 지원실태 감사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다.

 감사원이 징계를 요청한 이유는 2008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중소 조선사들에 대한 선수금 환급보증서(RG) 지원이 허술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떼일지 모르는 회사에 심사도 제대로 안 했고, 건조능력을 초과해 RG를 발급해 결국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조선사는 수주 후 2~3년간 선주로부터 선수금 형태로 대금을 분할 지급받는다. 이 돈으로 배를 만들고, 시설투자도 한다. 하지만 선주는 나중에 배를 못 받아 돈을 떼일 위험이 있다. 여기에 대비해 금융사가 발행한 RG를 조선사에 요구한다. 그런데 당시 금융위기로 위기에 몰린 은행들이 RG 발급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이미 발급된 물량마저 취소했다.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 조선사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특히 이들이 많이 수주한 벌크선과 컨테이너선은 중국과의 경쟁이 치열했다. RG가 취소되면 곧장 중국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결국 그해 말 무역보험공사가 나서 민간 은행이 거절한 RG를 떠안았다. 이후 사정은 더 나빠졌고, 일부 조선사는 망했다. 손실은 거기서 발생했다.

 물론 급하게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심히 따지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정신 없는 시기일수록 규정 위반이나 부정이 끼어들 소지도 있다. 그런 것을 막아보자는 감사는 필요하다. 하지만 뒤늦게 위기 때 지원해준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정책 담당자들의 손발을 묶는 효과밖엔 없다.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소 조선사는 많이 무너졌다. 반면 중국 조선사들은 정부의 금융지원을 등에 업고 물량을 싹쓸이하고 있다. 30여 년 나라 경제를 이끌다 위기를 맞은 조선업, 살려야 한다는 말은 많지만 대책은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우선 징계가 무서워서 말이다.

최현철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