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⑪ 우리가 죽인 섬나라 투발루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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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1994년 주한 투발루 명예 총영사관 개관식에서 투발루 국기를 들고 있는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김 회장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주한 투발루 명예 총영사직을 맡고 있다.

“탈로파.”

내가 요즘 가장 반갑고도 가슴 아프게 듣는 외국어 인사다. 남태평양 피지 북쪽에 9개 섬으로 구성돼 있는 인구 1만1000여 명의 작은 산호초 섬나라 투발루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다. 그 아름다운 섬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해수면이 계속 높아지고 있어 2060년께 나라 전체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투발루 주민들은 인류 최초의 기후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1994년 9월 2일, 투발루 국기가 보령그룹 대강당에 내걸렸다. 그날 행사는 투발루가 대한민국에 명예 총영사관을 개관하는 기념식으로, 내가 주한 투발루 명예 총영사에 취임하는 행사를 겸하고 있었다. 영국 연방국가의 하나인 투발루는 1978년 한국과 수교를 맺었지만 대사관이나 영사관 같은 교류 창구를 두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양국 교류 확대와 ‘더불어 사는 지구촌’ 정신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총영사관을 보령그룹 사옥 안에 두고 내가 명예 총영사를 맡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명예 총영사에 취임한 후 나는 양국을 잇는 적극적인 가교 역할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투발루의 외교 창구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피지의 재무장관이 우리 회사를 방문해 남태평양 인접국들과의 교류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그해 처음으로 일주일간 투발루와 피지를 방문해 양국 보건장관과 외무장관을 만나 민간외교 및 경제협력 확대를 위한 진전을 이뤘다. 이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투발루 발전을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어느 날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투발루가 바닷물에 잠겨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얘기였다. 원인은 역시 선진국들의 무분별한 온실가스 배출과 지구온난화였다. 1990년대 들어 투발루 9개 섬 중 2개가 가라앉았다. 잘사는 나라들의 공장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로 인해 가장 큰 재앙을 맡게 된 것이 공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투발루였다. 결국 투발루는 2001년 국토 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인근 국가들은 이민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주한 피지 대사(왼쪽에서 둘째)가 보령제약을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둘째가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피지는 투발루의 외교 창구 역할을 맡고 있다.



나는 투발루 주민의 한 사람이 된 마음으로 다시 그곳을 찾았고, 해안 도로에서 주민들이 들고 선 현수막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현수막엔 “투발루를 도와주세요! 당장 변화가 필요합니다(Help Tuvalu! Time for Change)”라고 쓰여 있었다. 돌아온 후 나는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발루를 살리려 애쓰고 있다. 그조차 효과가 없으면 투발루 최초이자 마지막 명예 총영사로서 현지에 돌아가 현수막을 들려고 한다. 자신들이 일으킨 문제점 때문에 한 나라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잠기고 있는데 다들 남의 탓이라고 외면하는 잘사는 나라 사람들에게 내 작은 외침이라도 들려주고 싶다. 그러다 현지 사람들과 함께 바닷물에 잠겨버려도 좋다.

우리가 투발루 사람을 직접 만날 일이 없고, 투발루를 방문할 일이 없기에 그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구촌 가족이 또 다른 가족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젠가 외면당하는 지구촌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다행히 인터넷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투발루 주민 돕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 2달러 정도를 기부 받으면 섬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과 투발루의 아이들이 편지를 교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한 아이의 편지 내용이 내 마음에 새겨졌다.

 “투발루 친구들아. 수업시간에 너희 나라가 지구온난화 때문에 가라앉고 있다고 들었어. 너희들은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데 나를 비롯한 선진국 사람을 대신해 피해를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해.”

우리가 죽인 투발루를 우리가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언젠가 당당하게 “탈로파”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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