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커피가루·생선뼈도 그의 손에 닿으면 컬러가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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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완벽한 색채에 대한 열정을 담은 ‘나노’ 연작 앞에 선 화가 홍정희씨.


그의 작업실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서울 서초동 인근 오피스텔이다. 두꺼운 철문을 닫으니 적막강산. 몰두하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각종 화구에 재료로 쓰는 톱밥·스티로폼 등이 들어차있다. 예순여섯 나이가 믿기지 않은 젊은 외모지만, 유난히 붉은 손은 까칠하게 텄다. 홍정희 작가 얘기다.

 홍씨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20일까지)을 열고 있다. 6년 만의 개인전이다. 2005년부터 천착해온 나노 시리즈 70여 점을 내놓았다. 오방색에 기초한 강렬한 원색의 색면추상을 지속적으로 변주해 ‘색채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그다.

 “제게 색은 표현수단이 아니라 본질 자체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이나 좋은 물감도 결국 변한다는 게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나노이론을 접하게 됐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인데, 그 상태에서도 줄기차게 변화하고 운동하는 게 나노잖아요. 순간 무릎을 쳤습니다. 물감이 변색되고 내가 작품을 할 때와 남이 볼 때 다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작가로서 어떤 강박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나노 시리즈는 예의 밝고 강렬한 원색에 꽃이나 산, 집이나 새 등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패턴이 반복된다. 물감과 톱밥을 섞고 얇은 스티로폼 포장지 등을 활용한 독특한 질감은 화강암 표면 같은 효과를 내며 색의 깊이를 더한다.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일정하게 줄지어 가는 삼각형의 화폭을 보고 있으면 거대한 산맥의 아스라한 연봉을 바라보고 있는 착각도 일으킨다”고 했다.

 완벽한 색을 향한 그의 열정은 수공의 의미를 새삼 일깨우기도 한다. 발색(發色)을 위해 톱밥·커피가루와 물감을 섞거나 유화 특유의 기름기를 걷어내고 푸근한 맛을 살리기 위해 생선뼈를 갈아 넣는다. 특수 마스크를 써도 지독한 냄새와 자극은 피할 길이 없다. 미국 미시건대에서 2년간 교환교수로 있다가 돌아온 직후에는 직접 통나무를 켜서 캔버스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작가는 “물감과 색채가 어디에 종속되기보다 그 자체로 생생한 삶을 살아내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 나는 회화가 그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회화 자체로 남으려는 여정을 작업을 통해 표명해왔고, 나 역시 그렇게 물감과 색채와 함께 살고 있다. 최소화 후 스스로 변한다는 것. 이것이 근작 나노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02-519-0800.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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