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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박근혜의 침묵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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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지난주 나는 ‘박근혜, 소·돼지에게 가야 한다’고 썼다. 차기 지지율 1위인 핵심 정치인이 구제역이나 천안함·연평도 같은 중대 사태에 너무 침묵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한국 사회에는 박근혜에 대해 이런 시각이 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대변인인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이 어제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 지적을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박 전 대표가 현안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대선정국이 과열될 것이고 이는 대통령의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지율 1위가 벼슬이나 당직은 아니다”며 지지율 1위이기 때문에 중요 현안에 나서야 하는 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박근혜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저 한 사람의 국회의원인가. 아닐 것이다. 박근혜는 1970년대 5년 동안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대표와 대통령 경선후보를 지냈다. 지금은 의원 50여 명을 거느린 비주류 수장(首將)이자 압도적인 차기 1위다. 이 다섯을 합치면 그는 대한민국의 넘버 2 권력자다.

 이처럼 중요한 지도자는 ‘국민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때가 있다. 4대 강이나 과학벨트 같은 주요 정책마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안함·연평도 같은 국가 비상사태나 구제역 같은 국가적 재앙에서는 국민의 분노와 고통·슬픔을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안을 언급하는 것과 국민과 함께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다. 천안함·연평도 사태 때 그는 북한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고 희생자를 조문했다. 그러나 국민적 지도자 박근혜에게 그 정도는 미흡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사태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국민과 섞였다’고 느낀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대선정국 조기과열을 경계하는 것은 신중하고 지혜로운 처신이다. 하지만 조기과열을 피하면서도 국민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박근혜가 평택 해군기지에 가서 비극적인 천안함 사체(死體)를 본다고 해서 그것이 대선의 과열인가. 연평도에 가서 북한이 어떻게 남한 국민을 죽였는지 생생히 보는 게 대선 행보인가. 수많은 축산농민이 통곡했고 수명의 방역 공무원이 과로로 죽었다. 박근혜는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농민과 방역 공무원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진이 그저 몇 장 홈페이지에 올라오면 많은 국민은 “아 박근혜도 아파하는구나”라고 느낄 것이다. 박근혜 인터넷 사이트에 구제역·천안함·연평도는 거의 없다. 대신 복지정책과 대선가도 질주라는 뉴스만 많다.

 그가 보다 더 신중하다면 지난 연말 대선 싱크탱크를 공개적으로 출범시키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 대선정국을 달구는 것이었고 파장은 지금도 있다. 그리고 박근혜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연설을 한 것은 무슨 자격이었나. 세종시가 자신이 당 대표 때 추진했고 대통령 경선후보로서 공약한 것이기에 발언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구제역·천안함·연평도는 전직 대표·후보와 상관이 없는 일인가.

 특히 김정일의 악행에 대한 박근혜의 침묵은 김정일의 오판을 부를 수 있다. 2002년 방북 때 박근혜는 김정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김정일과 매우 우호적인 회담을 했다. 그런 박근혜가 계속 침묵하면 김정일은 “2년만 버티자. 박근혜가 집권하면 남북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다”고 오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의 장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상황이 진행되는데 박근혜는 계속 침묵만 할 것인가. 압제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은 그의 ‘복지 대상’이 아닌가. 박근혜는 나서야 한다. 김정일의 악행을 규탄하고 북의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국민에게는 김정일의 변화가 없는 한 어설픈 대화·지원은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박근혜 같은 지도자에겐 침묵은 때론 죄가 될 수 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