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검〉을 통해 본 김혜린의 작품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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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화가 김혜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장편 〈불의 검〉이 재발행에 들어갔다(도서출판 대원). 육영출판이 없어진 이후, 많은 그녀의 독자들이 원했던 바이기에 그녀의 팬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대단하다. 그녀의 다른 작품 〈비천무〉의 영화화로 인해 다른 만화가들보다 더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김혜린.

83년 〈북해의 별〉을 시작으로 만화계에 발을 디딘 그녀는 주로 굵직한 역사물을 위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결같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섬세함 때문이 않을까.

그녀의 작품 〈불의 검〉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먼저 내용을 보자.
〈불의 검〉은 고대 북방 민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물은 실제적 고증과 작가 특유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접합시켜야 하므로,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녀는 전작 〈비천무〉를 그리기 위해, 그 당시의 동양 건물, 복식, 역사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의 검〉을 보면 그녀 특유의 섬세함과 세심함으로 실존 사실과 인물 속에 그녀의 창작물이 무리없이 녹아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작품 중에 나오는 나라와 강 이름 등은 실존하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속에서도, 주원장과 자하랑(비천무), 생쥐스트와 유제니(테르미도르)의 만남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작품을 접하면서 우리가 읽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 다음 〈불의 검〉속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그녀의 섬세함을 볼 수 있다.
수하이바토르나 카라 등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주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 우리들은 그들의 고뇌나 슬픔 등의 감정을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 느낄 수 있다.
어정쩡한 설정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충분히 그들의 입장이 드러나 있고, 그것들은 결코 주연을 넘어서지 않고 있기에, 우리는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사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는 유난히도 글이 많다. 소재 특성상 설명이나, 시, 편지 등이 길게 존재한다. 이것은 비단 〈불의 검〉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든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이다.
N세대라고 불리는 청소년들에게는 어색할지 모르는, 시적이고 감상적인 글, 작품 전체를 통괄하는 이미지들로 인물들의 그 당시 감정을 전해주며, 그네들의 말은 절묘하고 적절하여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한다.
점점 가벼워지는 우리이기에 그녀의 대사에서 더욱 진중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제 그림 자체를 보자.
현재 많은 만화가들이 그림에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붓의 사용이 유난히도 많다. 가느다란 붓선이 인쇄가 잘 되지 않아 그녀의 의도대로 느낌이 나오지 않아도 꿋꿋히 사용한다는 그녀. 그런 섬세함으로 인해 등장 인물들의 표정은 더욱 정교해지고, 이것은 그녀 작품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녀의 고전스러움에서 묻어나오는 섬세함은 묘한 그녀 특유만의 매력을 가진다. 그런 이유때문일까 그녀는 남자 팬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우리 나라 순정만화가(이런 분류 자체를 별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 한 명이 되었다.

작가 김혜린은 '저질러 놓은 일'(?)이 많다. 이제 그 일들을 그녀만의 집중력으로 마무리할 일만 남았다. 곧 완결될 〈불의 검〉을 독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의 즐거움이란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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