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대기번호표 소용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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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19일 영업정지를 당한 부산2저축은행이 하루 전인 18일 예금을 빼내려 몰려든 고객에게 나눠준 번호표.

8개 저축은행에 대한 영업정지가 이어지면서 각 저축은행이 남발한 대기 번호표에 대한 법적 책임 공방도 일고 있다.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영업 정지 소식이 알려진 지난 17일 오전.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접한 김모(52)씨는 불길한 생각에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 지점으로 달려갔다. 부산2저축은행은 부산저축은행 계열사로 김씨는 이곳에 6000만원의 예금을 가지고 있었다. 지점은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고객들의 인출 요구가 빗발치자 은행은 번호표를 주며 고객들을 달랬다. 김씨가 받은 번호표는 3500번, 업무 가능일은 3월 2일로 적혀 있었다. 직원의 설득에 김씨는 발길을 돌렸지만 이틀 뒤 영업정지 소식을 들었다.

 김씨뿐만이 아니다. 지난 17일 부산·대전저축은행의 영업정지 후 이틀을 버텼던 나머지 부산 계열사 세 곳(부산2·중앙부산·전주저축은행)은 지점별로 수천 장 이상의 대기표를 뿌렸다. 부산2저축은행의 경우 본점과 지점 세 곳에서 번호표가 17∼18일 이틀간 3만1300장 배포됐지만 지급은 6650명에게까지만 이뤄졌다.

 김씨처럼 영업정지 이전에 예금 인출 의사를 표시했다면 과연 보호받을 수 있는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법적 공방이 벌어질 조짐이다.

 금융 당국은 아무런 법적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의 한 관계자는 “영업정지 이후 일절 예금 인출이 금지되는 만큼 대기표를 받았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했다. 예보 관계자도 “5000만원 범위 내라면 예금보장제도로 해결될 것이고, 그 이상이라면 보장이 안 된다”며 “번호표를 받았다고 돈을 먼저 주거나 5000만원 이상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은행에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지만 저축은행이 파산 절차를 밟는 이상 소송을 한다 해도 큰 실익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법무법인 한누리의 변환봉 변호사도 “번호표를 주고받는 행위가 고객은 예금 인출의사를 표시하고, 은행은 이를 수락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예금자들보다 채권 순위가 올라간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물론 개인 책임은 물을 수 있다. 금융회사 임직원들이 허위 사실로 고객을 속였거나 개인적으로 예금 보장을 약속했다면 임직원 개인에 대한 별도의 손해배상소송은 가능하다는 게 법률 전문가들의 얘기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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