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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 [52] 오늘의 갈등은 내일의 창조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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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22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오늘의 갈등은 내일의 창조력이다’는 주제로 한국선진화포럼 월례토론회가 열렸다.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어령(이화여대 석좌교수·사진) 중앙일보 고문이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조문규 기자]


튀니지 ‘재스민 혁명’, 이집트 ‘키파야 혁명’. 최근 일어난 이 두 혁명의 배경에는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있다. 오랫동안 쌓여 온 갈등이 SNS를 통해 자유롭게 표출되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SNS가 침묵하는 대중, 결집하지 못하던 개인의 불만을 끌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SNS 역시 갈등 해결의 도구로 자리 잡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 22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이어령(이화여대 석좌교수) 중앙일보 고문이 ‘오늘의 갈등은 내일의 창조력이다’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한국선진화포럼(이사장 남덕우)이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한 한국선진화포럼의 월례토론회에서다. 강연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지난달 31일 서울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한국내 이집트인들이 반 무바라크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호저(豪猪)’의 딜레마에 갇힌 한국=“갈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숲 속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날 강연에서 이 고문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갈등 해소법을 알려면 숲의 문화를 살펴봐야 한다”며 운을 뗐다. 언뜻 보기에 숲이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숲이야말로 강자와 약자가 다투는 가혹한 전쟁터라는 것이다. 이 고문은 “칡·등나무처럼 넝쿨 달린 활엽수들이 끊임없이 기존의 식물을 밀쳐내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숲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선조들은 숲에서 그런 것처럼 얽히며 생기기 마련인 갈등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을까. 이 고문은 이를 ‘소나무의 삶’에 비유했다. 칡처럼 함께 얽혀 살기보다 척박한 땅으로 나와 홀로 뿌리내리며 사는 소나무를 더 선호했다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따라 주지 않았다. 학연·지연·혈연이란 넝쿨이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소나무의 삶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삶이다. 이 고문은 “우리가 깨끗한 사회로 가기 위한 개혁에 실패한 것은 다 덮고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자 하는 정신과 얽힌 대로 살려 하는 현실의 간극을 해결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의 갈등은 쉽게 해결하기 힘든 양상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서로 가까이 가면 바늘에 찔려 죽고, 떨어지면 추위에 떨 수밖에 없는 ‘호저’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거다. 호저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날카로운 바늘이 돋은 짐승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호저의 딜레마를 인간의 ‘독립의 욕망’과 ‘동질화의 욕망’의 투쟁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이 고문은 “혼자이면서도 함께하고 싶기도 한 양면가치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갈등을 드러내 놓기보다 외면하거나 터부시해 온 탓이다. 그는 “이렇게 한국 사회가 묵은 갈등을 풀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의 문화, 계급 간의 투쟁과 같은 서구의 낯선 관계가 들어와 사회가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진단했다.

◆SNS 소통,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호저의 공간’. 이 고문은 SNS가 주도하는 디지털 공간을 이렇게 풀이했다. SNS 속에서는 지연·학연·혈연(강한 유대)으로 얽힌 전통적인 관계보다 좀 더 자유로운 ‘제4의 관계’를 맺을 수 있어서다. 제4의 관계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경험을 나누고 서로 공감할 수 있다. ‘따로이면서 또 같이’ ‘자유로우면서 외롭지 않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고문은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호저의 딜레마를 풀 실마리를 SNS에서 찾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제4의 관계라고 불리는 새로운 디지털 관계와 전통적인 아날로그 관계가 합쳐지는 긴장 사이에서 엄청난 창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제4의 관계가 갈등을 줄이는 ‘쿨한 관계’일 수 있지만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 고문은 “정치판에서 야당끼리 있으면 여당 이야기를 듣지 않듯 SNS 공간에서도 다른 곳과 소통이 두절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전통적인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소통이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지만 때로는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화 기자

네덜란드선 평화롭게 공존하다 한순간 폭발

다문화 사회 갈등 어떻게 풀까

이날 한 시간여에 걸친 이 고문의 강연이 끝나자 포럼에 참석한 150여 명의 참가자 사이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참석자들은 특히 다문화 가정들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외국인 노동자 급증과 국제결혼 증가로 다문화 사회로 빠르게 진행 중이다.

 이 고문은 다문화 가족 문제에 대해 네덜란드를 예로 들었다. 네덜란드는 한때 유럽에서 ‘다문화 사회의 모범 국가’라 불렸다.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 민족이 살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모든 것을 뒤엎었다. 테오 판 고흐라는 영화감독이 2004년 만든 학대받는 이슬람 여성에 관한 다큐멘터리 단편영화였다. 테오 판 고흐는 영화를 만든 후 한 무슬림 광신도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됐다. 화난 군중은 이슬람 사원을 불태웠고, 이슬람 신도는 교회를 불태웠다. 이 고문은 “다문화 사회로 인한 갈등은 아무리 튼튼한 시스템이 받쳐줘도 단 한 사람에 의해 증폭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다문화 가족에 대한 포용과 배려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단일민족 우월감도 극복해야 할 요소다. 이 고문은 “다문화 가족의 문제를 방치하다간 10년, 20년 후 엄청난 갈등에 휩싸일 수 있다”며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단일민족만을 강조하며 다문화 가족을 영원히 섞일 수 없는 섬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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