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Special] 김한길·최명길 부부 “가족이라는 복권 당첨된 것도 모르고 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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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경력 참 화려하다. 우선 소설가와 TV 토크쇼 진행자로 이름깨나 날렸다. 이후 만 12년 정치하면서 문화관광부 장관, 여당(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냈다. 국회의원도 세 번 했다. 그런데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여의도 정치에서 멀어진 뒤론 뭐라고 부를지 좀 애매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직함은 뭐라고 쓸까요?” “그냥 ‘김한길씨’로 합시다.” 하지만 김한길 씨도 현직이 없는 건 아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 그의 직함이다. 요즘 드라마 ‘근초고왕’과 ‘폭풍의 연인’ 두 편에 동시 출연 중인 배우 최명길 이 그의 아내다. ‘두 아들의 아빠’도 겸직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는 남편과, 그런 남편이 든든하다는 아내를 함께 만났다.

글=김선하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철제 계단을 올라서자 검둥개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뛰는 품이 물려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반가워서다. 주인이 어지간히 손님 안 받았다는 얘기다. ‘옥탑방’. 서울 이촌동 김한길씨의 개인 사무실 이름이다. 이름처럼 작은 단층건물의 옥상에 담을 쌓아 만든 공간이다. 문을 열자 김한길·최명길 부부가 손님을 맞았다. 남편은 청바지, 아내는 말쑥한 와인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불출마 이후 어떻게 지냈나.

김한길:“그동안의 보상 차원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1순위였다. 그밖엔 책 보고, 글 쓰고, 산책하고, 빈둥대고…. 빈둥거린다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더라. ‘재충전’이란 말 많이 하는데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게 비우는 거다. 비워야 채울 수 있으니까. 세상을 몇 발자국 밖에서 쳐다보는 거지. 우두커니, 물끄러미…. 뭐, 깨달음이랄 것까진 없지만 거기서 많은 걸 얻는다.”

③년간 얻은 걸 하나만 꼽는다면.

한길:“들어오다 개들 봤나? 내가 요즘 개 키운다. 두 달 전에 새끼를 낳았다. 하루하루 커가는 게 너무 신비롭고 예쁘다. 그런데 누가 묻더라. ‘자식도 키워본 사람이 강아지 크는 게 그리 예쁘냐’고. 순간 바늘로 찔린 것 같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나는 아들 둘 크는 걸 지켜보지 못했다. 언제 첫 걸음마를 했는지, 처음 ‘아빠’라고 불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가족이란 ‘복권’에 당첨된 줄도 몰랐다. 너무나 큰,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기껏 강아지에 빠져 있는 거지.”

 옥상 한쪽엔 제법 큰 여행용 텐트가 세워져 있었다. 처음엔 김한길씨가 노숙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니 두 달 됐다는 강아지 ‘서란’이가 자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태어나 발음을 따서 이름 붙였단다. 김한길·최명길 부부에겐 올해 각각 중학생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두 아들이 있다. 강아지 추운 것도 못 견디는 남자가 두 아들에겐 아빠 노릇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3년 새 어떻게 달라졌나.

최명길:“이렇게 애들 잘 돌보는지 전엔 몰랐다. 요즘엔 되레 내가 더 바빠서 남편이 아이들 챙길 때가 많다. 그런데 나보다 낫더라. 한번은 둘째의 방학 시간계획표를 짜준 걸 봤는데 엄청 꼼꼼하더라. 공부·휴식 시간을 10분 단위로 착착 나눠서…. 초등학생 시간표를 무슨 장관 스케줄처럼 만들어 놨나 싶기도 했는데, 내 여동생이 그거 보고 ‘언니, 우리 애도 형부에게 부탁하면 안 될까’ 하더라. 내가 데뷔 이후 드라마 두 편에 같이 출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남편이 안 도와주면 어려웠을 거다.”

●뭘 가장 많이 도와줬나.

명길:“애들 문제가 제일 크다. 아이들 학교도 데려다주고, 큰아이 학원 갔다 밤에 오면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마중 가고….”

한길:“이 사람 새벽 촬영 있을 땐 애들 하루 세 끼를 내가 다 챙겨 먹일 때도 있다. 솔직히 요리는 잘 못하고, 새벽에도 문 여는 햄버거집은 안다. 얼마 전 둘째 학예회에도 내가 갔다. 전부 엄마고 아빠는 딱 나 하나더라고. 민망하긴 했는데 아들 기죽을까 봐 끝까지 남아서 사진도 찍고, 다른 애들 엄마랑 인사도 했다. 나중에 ‘아빠가 가서 창피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내 친구 엄마들이 아빠랑 악수하고 좋아하더라’고 말해주더라.”

●큰아들이 오바마 상을 받았다던데.

명길:“ 외국에서 생활한 적도 없는데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았다. 상 받은 아이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 가서 미국 아이들과 영어로 토론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괜찮게 했던지 오바마 대통령상을 받아 왔더라. 올해 청심국제중학교에 들어간다.”

●부부가 다 바빠서 아이들 공부 챙기기 힘들었을 텐데.

명길:“아이를 들볶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노력했다. 학원이나 공부방법을 선택할 때 ‘엄마 정보망’이 중요하더라. 아들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 내가 ‘왕언니’다. 학교에서 엄마들이 하는 청소·배식 등에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주말에 애들이 축구하면 도시락 싸 가서 다른 엄마들과 같이 목 터져라 응원하고. 그러니까 다른 엄마들이 도와줬다. 한 번은 우리 애가 수학이 약해 걱정이라고 했더니 연습장을 보여 달라더라. 척척 넘겨보더니 이건 풀이 과정이 이렇게 돼야 하는데 이게 부족하다고 알려줘서 놀랐다. 직장 여성이 힘들긴 하겠지만 성의를 보이면 남들이 인정하고 도와줄 거다.”

●애들 얘기만 했는데 남편이 아내 일은 안 도와주나.

한길:“최근 사극 ‘근초고왕’에서 아내가 호평을 받은 연기가 있었다. 그거, 촬영 전날 집에서 내가 상대역 다 해줬다는 거 아니냐. 농담 삼아 말하자면 전직 문화부 장관 수준의 모니터링을 수시로 접할 수 있다는 게 배우 최명길의 특권이지. 이쯤 되면 ‘내조의 여왕’이 아니라 ‘외조의 황제’ 아닌가? (아내가 원하면) 나는 뭐든지 한다. 한계가 없다.”

●‘근초고왕’에서 맡은 ‘해비’가 남편을 죽이는 역할이던데, 감정이입은 어떻게 하나.

명길:“드라마 할 때는 역할에만 몰입한다. 또 아직까진 이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한길:“(아내를 바라보며)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웃음).”

●정치할 땐 어떤 남편, 어떤 아빠였나.

한길:“1995년에 결혼하고 이듬해 국회의원이 됐다. 97년 대선 땐 당시 김대중 후보 방송대책본부장을 맡아서 후보 모시고 전국을 다니느라 집에도 잘 못 갔다. 대선 한 달 전쯤이 아내 생일이었는데 미안해서 ‘근사한 곳에서 저녁 산다’고 약속했다. 그날 일 대강 매듭짓고 막 나가려는데 김 후보가 ‘김 의원, 나랑 저녁 하면서 얘기 좀 하지’ 하시더라. 결국 새벽에야 집에 갔는데 아내가 그때까지 안 자고 우두커니 있더라.”

명길:“당연하죠. 잠이 오겠어요.”

한길:“그날 밤에 김대중 후보와 뭔 얘기 했는지는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새벽에 본 아내의 허전한 표정은 지금도 안 잊혀진다. 그때 후보에게 말씀드리고 갔어야 했는데…. 갑자기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가게 돼 큰아들 돌잔치를 취소한 적도 있다.”

 정치 얘기가 나오자 김한길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당선에 상당히 기여한 인물이다. 본인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전략가’라는 평도 그래서 얻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분을 어떻게 기억하나.

한길:“한 분은 아버지, 다른 분은 형님 같았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때 내 아내에게 ‘신혼 신랑 빼앗아 미안하다’고 격려하시던 따뜻한 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며칠 뒤 서울 명륜동 그분 자택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던 때가 기억난다. 담배를 권하시기에 ‘이제 대통령 되셨으니 담배는 따로 피우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허, 이러지 맙시다. 마음으로 대통령을 존경해 주면 됐지, 갑자기 담배까지 따로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하시더라. 노 대통령 임기 말에는 나와 껄끄러운 분위기인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만나면 서로 담배를 권하며 나눠 피운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두 분이 집권했던 10년의 성공과 좌절을 함께 겪었다. 회한이 없을 수 없다. 문득문득 그분들이 지독하게 그립다.”

●다시 정치할 생각 있나.

한길:“그렇게 권유하는 분들도 있지만, 아직은 조용히 생각을 더 다듬을 때인 것 같다. 꼭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는지도 헤아려 볼 필요가 있겠고.”

 정치 다시 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최명길씨는 ‘아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물었다.

●남편이 혹시 다시 출마하겠다고 한다면.

명길:“(다시 한숨을 쉬며) 어떤 결정이든 남편의 생각을 존중한다. 물론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안 하는 게 좋고. 난 지금이 좋다.”

●그럼 남편이 어떤 일 했으면 좋겠나.

명길: “다시 글 쓰고, 토크쇼 진행하고…. 나는 좋은 영화 볼 때도 남편이 (시나리오를) 쓰면 정말 좋은 작품 나오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이 쓴 소설 『여자의 남자』가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는데 그때 나도 여배우 물망에 올랐다. 다른 방송국 드라마에 이미 캐스팅돼 출연은 못 했지만. ‘결혼’이란 드라마였는데 나중에 그 작품으로 내가 한국방송대상을 받았다. 우리가 사귀기 전이었는데 남편이 ‘결혼도 안 한 여자가 결혼이란 드라마로 상을 받다니 축하한다’고 축전을 보냈더라.”

●아내가 저렇게 말하는데 다시 책 내고, 드라마 극본도 쓸 생각 있나?

한길:“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같은 본격 정치 드라마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한 출판사에서 선인세까지 떠안겨서 책도 쓰긴 해야 하는데…. 글을 쓴다면 ‘기록’에 연연할 생각은 없다. 그것들을 녹여서 뭔가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인 글, 그게 내 본업이다.”

 생각해보니 그는 정치하기 전 발표한 소설 『여자의 남자』를 300만 부가량 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TV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도 3년 가까이 진행했었다.

●소설가와 토크쇼 진행자 시절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한길:“93년부터 정치하기 전까지 토크쇼를 했다. 150명 정도 출연했다. 기억에 남는 분이 많다. 고은 시인은 스튜디오 대기실에서 양주를 한 병 다 드셨다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진행을 했다. 어쩐지 너무 큰 소리로 거침없이 말씀하시더라. 박찬호 선수는 미국에 찾아가서 녹화를 했는데 녹화 중간에 LA다저스 구단이 박 선수를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낸다고 발표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에게 카메라를 치우고 ‘여기서 이겨내야 박찬호’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은 이런 말을 하셨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이 더우면 걷어차고, 필요할 땐 언제고 끌어당겨 덮을 수 있는 이불 같아야 한다’. 덥다고 걷어차는 것도 감수한다…. 쉬운 일 아니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아빠가 되려고 애쓰고 있다.”

●가수 조영남씨와도 친하지 않나? 인터뷰 때마다 ‘화개장터, 김한길이 작사했다’고 하던데.

한길:“젊어서 미국 살 때 가까워졌다. 귀국해서도 한동안 영남이형 서울 옥수동 단칸방에 얹혀 지냈다. 어느 날 중앙일보 사회면에 난 화개장터 소개 기사를 보고 내가 가사 쓰고, 영남이형이 곡을 썼다.”

●조영남씨는 ‘처음엔 가사가 너무 유치해 부르기 민망했다’고 했다.

한길:“영남이형이 이 얘기 알까 모르겠는데…. 미국 있을 때 이장희형과도 친하게 지냈다. ‘화개장터’ 들어간 앨범이 나올 때쯤 장희형이 서울에 왔었다. 전곡을 다 들어보더니 ‘여기선 화개장터 하나 건지겠는데’ 하더라고. 그래도 그게 조영남 가수 인생 40년에서 유일한 히트곡이라니 다행 아닌가.”

 조영남씨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최명길씨가 속상해했다. “그분은 왜 자꾸 김한길과 ‘친구’라고 하느냐”는 게 요지다. 조영남(66)씨는 김한길(58)씨보다 여덟 살 많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남편과 친구라고 하니 남들이 남편 나이도 그쯤 된 줄 안다는 것이다. 김한길씨는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장희형도 영남이형 때문에 한동안 내가 형인 줄 알았다”며 웃었다.

●결혼 17년차다. 다른 부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명길:“여자가 일과 가정에서 둘 다 잘한다는 건 쉽지 않다. 힘들 땐 ‘내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얻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좋은 아이를 낳았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결 힘이 날 거다.”

한길:“가족에게 진 빚 갚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 안 되는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가까이에 널브러져 있는 엄청난 행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그거, 복권에 당첨된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다.”

j 칵테일 >> “최명길 배우는 왜 같이 안 오셨습네까?”

최명길씨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용의 눈물’은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2001년 김한길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남북 문화장관 회담을 위해 평양에 갔을 때다. 분야별 남북 장관 회담을 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북측은 그가 평양 순안공항에 내릴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극진히 대접했다.

 그런데 환영 만찬장에서 만난 북측 고위 인사들이 그를 붙잡고 물었다. “김 장관 선생, 최명길 배우는 왜 같이 안 오셨습네까?” 김 장관이 “어떻게 내 집사람을 아느냐”고 묻자 “우리도 다 안다”는 답이 돌아왔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자 김 장관은 나중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데리고 왔다가 못 데리고 돌아갈까 봐 안 데려왔다”고 답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심지어 북한에서까지 아내가 나보다 인기가 많더라”며 웃었다.

>> “최명길의 남자가 셋으로 불어 더 불리하죠”

사진=KBS 화면 캡처

부여구(근초고왕·감우성):“아무리 간악하다고 하나 어찌 지아비를 죽일 수가 있는가!”

해비(최명길):“허면 그 소중한 지아비가 내 아들을 죽이게 둬야 했단 말이냐. 남편이냐, 자식이냐 둘 중 하나라면 자식을 살리지 남편을 택할 줄 아느냐.”

 KBS 사극 ‘근초고왕’의 한 대목이다. 김한길씨가 아내 최명길씨의 연습 상대가 돼줬다는 장면이다. 어떤 남편이라도 아내와 이런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뜨끔할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서로를 어떤 배우자라고 평가하나.

한길:“지금 내 입장이 최명길을 평가할 만큼 넉넉하지 못하다. 이사 갈 때 떼어놓고 갈까 봐 걱정해야 할 입장 아닌가? 이제는 ‘최명길의 남자’가 (두 아들을 포함해) 셋으로 늘어나 더 불리하다. 그래도 아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남편이 되고 싶다.”

명길:“문득문득 ‘어머, 내 남편이 이 사람이야?’ 하고 돌아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결론은 ‘내 선택은 탁월했어’다. 나는 지금도 애들 아빠 눈에 가장 매력 있는 여자로 보여지고 싶다. 그게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명길씨에게 꿈을 물었다. “1995년 결혼 이후 영화를 한 번도 못했다. 몇 번 제의는 있었는데…”라며 남편을 쳐다봤다. 김한길씨는 주저 없이 “이제는 적극 밀어줘야죠”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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