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정월대보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선조들은 삼원사립(三元四立)을 중시했다. 삼원(三元)은 상원(上元:음력 정월 15일)·중원(中元:7월 15일)·하원(下元:10월 15일)을, 사립(四立)은 계절이 시작되는 입춘(立春)·입하(立夏)·입추(立秋)·입동(立冬)을 뜻한다. 상원(上元)인 정월 대보름 밤이 원소(元宵)다.

『삼국사기』 신라 진성여왕 4년(890)조는 “정월 15일에 왕이 황룡사에 행차해 연등(燃燈)을 구경했다”고 전한다.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 2년(1172)조는 ‘태조가 2월 보름을 연등절로 정했다고 해서 좇았다가 다음해부터 다시 상원(上元)을 연등절로 삼았다’고 기록해 신라와 고려는 연등행사가 성대했음을 말해준다.

중국 양(梁)나라의 종름(宗懍)이 편찬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는 ‘인일(人日:1월 7일)의 맑고 흐림으로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陰晴占豊耗]. 그날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권필(權韠, 1569~1612)은 『석주집(石洲集)』에서 “우리나라 풍속[國俗]에는 대보름달을 보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친다”라고 중국과 달리 대보름달로 풍흉을 점쳤다고 말했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 ‘사월팔일에 등을 걸다(四月八日放燈)’조에서 ‘중국은 14일부터 16일까지 대보름 밤 연등놀이를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월 초파일에만 한다’고 쓰고 있고, 조선 중기 황호도 “조선에는 연등행사가 없고 다만 이날 아침 선조의 사당에 잔을 올린다”라고 유교국가 조선에서 연등제가 없어지고 조상에 헌물(獻物)하는 날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홍대용(洪大容)도 『담헌서(湛軒書)』 ‘가묘다례식(家廟茶禮式)’조에서 “정조(正朝)에는 (가묘에) 탕과 떡을 한 그릇씩 올리고, 상원에는 약밥[藥飯]을 한 그릇 올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성현(成俔)은 ‘전가사십이수(田家詞十二首)’에서 ‘온 이웃이 술상을 차려놓고 대보름날 밤에 모여/ 동산 달맞이 하자고 서로 찾아다니네/ 달은 무심하게 떠올라 비추지만/ 노인들은 해마다 풍년을 점치네[老叟年年占豊兆]’라고 노래했다.

연등은 없어졌지만 대보름 달맞이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영월(迎月:달맞이) 등 서른일곱 가지의 대보름 민속행사를 적고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약밥·오곡밥·팥죽·작절(嚼癤:부럼) 등 먹는 풍속뿐이다. 마침 문화예술인들의 대보름 달맞이 행사에 초대를 받고 대보름에 대한 단상을 되새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