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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속 ‘아랍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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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한국을 대단하게 여기는 아랍인이 많다는 것을 이집트와 튀니지에 와서 실감하고 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대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묻지도 않았는데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산 휴대전화와 텔레비전, 냉장고를 쓰고, 한국산 자동차를 타면서 한국에 대해 형성된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국 드라마와 가요를 좋아한다는 젊은이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이집트 시민혁명의 성지(聖地)가 된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만난 젊은이들 중에는 ‘K-Pop’의 팬이라며 한국 가수 이름을 줄줄이 꿰는 여대생도 있었다. 튀니지에서 알게 된 아흐메드(52)는 “한국에 가보는 게 고등학생 딸의 소원”이라고 했다.

 이집트 일간지인 ‘알람 알 윰’지(紙)의 사아드 하그라스 편집국장은 아랍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을 분석적으로 설명했다. 그가 이해하는 한국의 성공 비결은 교육열과 민주화 두 가지다. 그는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력을 길러내고, 민주화를 통해 투명성을 높임으로써 짧은 기간에 경제적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인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집트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아랍권 국가가 저개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 이유가 민주화가 안 된 탓이라는 것이다. 국가 발전에 들어가야 할 돈이 권력자 개인의 호주머니로 줄줄 새는데도 이를 감시할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다 보니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700억 달러나 되는 돈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튀니지와 이집트인들 사이에서는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꿨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아랍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이집트의 반(反)정부 시위에 불을 붙인 튀니지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재스민 혁명’이 없었으면 무바라크 30년 체제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재스민 혁명’ 한 달을 맞은 튀니지는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 그동안 참았던 각계각층의 욕구가 분출하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기관과 공공기업, 민간기업 가릴 것 없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시위와 농성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과도정부의 행정력과 공권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새로 임명된 도지사들이 주민들의 반발로 청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세상이 뒤집어진 탓에 벼락출세한 무자격자도 많다.

 벤 알리 전 대통령의 흔적을 지운다는 뜻의 프랑스어 신조어인 ‘데베날리자시옹(debenalisation)’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 잘나갔던 사람은 능력과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물갈이 대상이 되고 있다. 신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달 전까지 스포츠 기사를 썼던 기자들이 지금은 정치 기사를 쓰고 있다. 벤 알리 찬양 기사를 썼던 기자들의 펜을 빼앗고 나니 스포츠 기자들만 남았다는 것이다.

 물론 민주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과도기적 혼란이고 진통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서로 자제하고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으면 애써 쟁취한 민주화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경제난이 심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아랍권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이집트의 변화로 ‘아랍의 봄’은 시작됐다. 이집트가 변하면 아랍권 전체가 변한다. 순서와 시간의 문제일 뿐, 결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바라크의 퇴진은 민주화로 가는 과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상호 이해와 존중 없이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다.

 아랍 국가들에 한국 상품을 팔고,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도 그들의 변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민주화를 위한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먼저 이룩한 한국의 도의적 책무다. 더구나 그들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을 존경하고 있다. <튀니스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