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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머신과 끝없는 대화, 자동차 신음·웃음까지 듣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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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4일 전남 영암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에서 열린 F1 코리아 그랑프리에서 경주차들이 서킷을 질주하고 있다. 대회 당일 비가 많이 내려 경기가 취소될 뻔했다. 페르난도 알론소(스페인)가 2시간48분20초810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중앙포토]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기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집까지 차로 태워서 온다. 돌아가신 분은 장의차로 장지까지 모신다.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현대인은 차와 떨어져 살 수 없다.

운송 수단이던 자동차는 놀이와 경쟁의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같은 차로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가, 어떤 차가 성능이 더 뛰어난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동차 경주가 생겨났고,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돈과 사람을 빨아들이는 거대 스포츠로 성장했다.

지난해 10월 전남 영암에서 열린 포뮬러 원(F1) 코리아 그랑프리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자동차 경주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고 있다. 21일(한국시간)에는 나스카(NASCAR·미국개조자동차경주협회) 시즌의 개막전으로 ‘자동차 경주의 수퍼보울’이라 불리는 데이토나 500이 열린다.

자동차 경주의 히어로인 레이서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어떻게 레이서가 됐고 어떤 대접을 받고 얼마나 강한 훈련을 할까. 스포츠 오디세이는 이런 궁금증을 안고 국내 최고 드라이버 두 명을 만났다. 국내 모터레이서의 지존으로 대접받는 김의수(39·CJ레이싱), 그리고 한국인 첫 F1 드라이버를 꿈꾸는 ‘해외파’ 문성학(21·성균관대)이다.
 
“힘과 스피드, 섬세함의 스포츠”
김의수는 자수성가형이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처음 아버지 승용차(브리사)를 몰아봤다”고 할 정도로 운전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 그는 ‘돈을 많이 벌고 사장이 되면 똑똑한 사람들 부릴 수 있다’는 생각에 고교를 중퇴하고 장사를 했다. 그러다 1990년 오프로드(비포장) 자동차 경주를 보고 ‘이게 내 길이다’ 싶어 경주 팀을 따라 나섰다.

문성학

고난의 행군이었다. 운전도 정비도 알아서 해야 했다. 선배들 어깨너머로 기본기를 배웠지만 실전 기술은 혼자 부딪치면서 하나하나 깨쳐나가야 했다. 한밤중에 연습을 하러 산길을 올라가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98년 온로드 경주에 참가한 뒤 2002년부터 3년 연속 국내 챔피언에 올랐다. 이세창·안재모 등 연예인들과 팀을 만들어 일본에도 진출했다.

김의수는 레이싱의 매력을 ‘힘과 스피드, 섬세함의 조화’라고 설명했다. 코너링 때는 체중의 3∼4배에 달하는 압력이 머리로 가해지는데 이를 버텨내지 못하면 목이 꺾여 기절하게 된다. 3중 단열 처리된 경기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섭씨 50도에 달하는 열기를 견뎌야 한다. 그래서 레이서들은 매일 목 근육 단련과 웨이트 트레이닝, 하체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에 섬세한 감각이 보태져야 레이서가 완성된다. 0.1초의 판단, 0.1도의 스티어링, 1㎜의 브레이크 조작에 따라 승부가 바뀐다. 김의수는 “여자친구와 말다툼을 해 기분이 조금만 나빠도 한 바퀴에 0.2∼0.3초 기록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레이서와 머신(경주용 차량)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자동차는 말은 못하지만 소리·냄새·진동으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다. 자동차의 신음소리, 웃음소리를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드라이버라고 할 수 있다”고 김의수는 말했다.

F3 테스트 받는 데만 2000만원 들어
김의수가 자수성가형이라면 문성학은 소년급제형이다. 열 살 때 용인 에버랜드의 서킷(자동차경주용 도로)에서 열린 카트(소형 경주용 자동차) 대회에 첫 출전해 4등을 했다. 이후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본에서 성인 선수들과 겨뤄 우승했다. 몸이 약했지만 근성만은 대단했다. 트랙 수백 바퀴를 돌고 먹은 것을 다 토해낸 뒤에도 다시 훈련을 했다.

문성학의 아버지는 그를 레이싱의 본고장 영국으로 유학 보냈다. 동양인이 한 명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고 훈련을 했다. 2007년 F1으로 가는 등용문인 포뮬러 르노 시리즈에 참가해 9위에 올랐다. 지난해는 F3 팀들로부터 테스트를 받았다. 올해 4월 F3 참가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실력이 아니라 돈이다. 포뮬러 경기는 돈 먹는 하마다. 문성학이 지난해 포뮬러 르노 시리즈를 치르는 데 든 비용이 5억원가량이었고, F3에 올라가면 두 배로 뛰게 된다. F3에 출전하기 위해 하루 서킷에서 테스트를 받는 데만 1500만∼2000만원이 든다. 드라이버 한 명이 머신과 함께 움직이는 데 미캐닉(정비)·엔지니어·코치·매니저·오너 등 5명이 동행한다. 서킷을 빌리는 데 400만원이고, 한 개 100만원짜리 타이어도 갈아줘야 한다. 개인사업을 하는 아버지 문창두씨가 기둥뿌리 몇 개를 뽑았지만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렵다. F3 선수가 기업 후원을 받지 않고 개인 돈을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문성학은 “레이싱의 매력은 심장을 멎게 하는 스릴과 짜릿함, 그리고 중독성에 있다”고 말했다. “포뮬러 대회 때는 출발 한 시간 전부터 헬멧과 복장을 착용하는데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선수들끼리 신경전도 엄청나다. 레이스가 끝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은 해머로 맞은 것 같아 정신이 멍해진다”고 그는 설명했다.

머신끼리 부딪쳐 불이 나고 차체가 몇 바퀴나 구르다 펜스에 처박히는 영상을 보면 ‘저 위험한 걸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포뮬러 대회는 안전규정이 엄격해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도 보험사는 차체에 대한 보험은 들어주지만 레이서의 ‘목숨값’은 보장하지 않는다.

“자동차 메이커들, 레이싱에 관심을”
레이서들은 평소 운전을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둘 다 “매우 안전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대답했다. 김의수는 “레이서들 전부가 폭주족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나도 앞에 가는 차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고, 울산에서는 ‘신’이었다. 지금은 무서워 폭주를 못 한다. 자동차가 사고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폭주족들에게 레이싱을 가르치면 100% 교화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성학도 폭주족 얘기가 나오자 “아주 귀엽죠”라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폭주족은 잠재적인 레이싱 팬이다. 자동차를 좋아하고, 속도를 즐기려는 사람들인데 이들의 욕구를 풀어줄 시설이 없기 때문에 일산 자유로나 한산한 고속도로에서 폭주를 뛰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국내 레이서들은 대부분 ‘투잡족’이다. 돈을 모아 경주용 차를 사고, 또 돈을 모아 대회에 출전한다. 수완이 있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스폰서를 끌어오기도 한다. 국내 프로 레이서 50여 명 중 고정 수입이 있는 선수는 10여 명뿐이다.

자동차 경주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이끈다. 미국·유럽·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큰돈을 들여 레이싱 전담팀을 운영하고, 경주용 차량을 통해 첨단 부품을 시험·보완한다. 국내 레이싱 시장은 아직 열악하다.

스포츠 오디세이가 국내 레이서들의 고민과 희망을 대신 전달한다. “자동차 메이커님들, 차 파는 데만 열심을 내지 마시고 레이싱에 관심과 책임을 좀 보여주세요. 레이싱 산업이 발전하면 자동차 산업이 함께 발전하고, 국산 자동차의 경쟁력도 그만큼 올라갈 테니까요.”

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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