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이 뿜는 화려한 향기, 김 하나만 있어도 진수성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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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호 10면

요즘 같은 생활패턴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명절이 바로 정월대보름이다. 설 지난 지 보름 만에 무슨 명절을 치른단 말인가. 설 때 그만큼 음식을 해댔으면 됐지, 또 새로운 음식을 하고 술 마시고 놀이를 하자는 발상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제 대보름은 그저 피땅콩이나 호두를 사다 먹는 날 정도의 감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옛날 농사짓고 살던 생활감각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면 다르다. 아마 정월대보름은 설의 연장선에 놓인 명절로, 그 마지막 날의 화려한 피날레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설부터 먹고 놀기 시작한 분위기가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8>겨울의 끄트머리, 대보름 오곡밥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겨울은 기나긴 농한기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후반까지도 사회 교과서에서, 농한기를 이용한 농촌 부업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었다. 비닐하우스가 없었던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설은 농한기인 겨울 명절의 절정이며 대보름은 그 마지막이었다. 대보름이 지나면 이제 농사꾼들은 씨앗을 고르고 농기구를 손보기 시작해야 한다.

올해 음력 달력을 보니, 17일이 대보름이고 19일이 우수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니 조금 있으면 언 땅도 풀릴 것이다. 그러니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대보름은, 석 달이 넘는 긴 휴가의 아쉬운 마지막 날인 셈이다. 대보름에 연을 끊어 날려버리고 쥐불을 놓는 것도, 보름달을 보고 풍년을 기원하는 것도 모두, 이제 그만 놀고 농사일 시작한다는 다짐과, 풍년이나 들었으면 좋겠다는 다짐과 기원을 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곡밥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섯은 인간의 손가락 수이며, 그래서 완전하게 꽉 찬 수다. 오곡은 모든 곡식이라는 의미이니, 오곡밥은 모든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으면서 한 해 농사가 무사히 치러지도록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원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요즘처럼 건강식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온갖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는 날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뭔가 핑계를 대고 평소에 해먹지 않던 음식을 먹어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오곡밥은 대개 쌀·콩·팥·수수·기장을 넣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 거나 다섯 가지 넣으면 안 되느냐고? 뭐 안 될 것이야 있겠는가마는, 강낭콩이나 녹두는 팥과 맛이 비슷하고, 조는 기장과 맛이 비슷하다. 게다가 오곡밥에는 쌀도 찹쌀을, 기장과 수수도 찰기장과 찰수수를 쓰는 일종의 찰밥인데, 여기에 찰기가 떨어지는 보리를 섞기에는 좀 생뚱맞다. 결국 맛의 차별성이 강한 다섯 가지 곡식을 고르려면 결국 이런 조합이 될 수밖에 없다.

대보름 즈음에 수퍼마켓에 가면 오곡을 모두 섞어 함께 포장한 것을 판다. 500g이나 1㎏ 소포장으로 다섯 곡식을 모두 사자니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뒤섞어 파는 잡곡에 눈이 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걸 샀다면 큰 낭패다. 왜냐하면 각 잡곡들은 크기가 달라, 조리시간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잡곡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쌀과 달리 잡곡은 간간이 돌이 있기도 하므로 기장과 수수, 팥은 씻을 때 조리질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 찹쌀·기장·콩은 그냥 물에 충분히 불려놓으면 된다. 찹쌀과 기장은 자잘한 알곡이므로 금방 붇고, 콩은 하룻밤 정도는 지나야 충분히 불어 함께 밥에 넣을 수 있다. 그에 비해 수수와 팥은 미리 가열하는 것이 좋다. 수수는 따끈한 물에 불리거나 아예 물을 넣고 한번 삶아놓는 것이 좋다. 팥은 단단하므로 반드시 미리 삶아야 한다. 그런데 이 둘은 무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따로 삶아야 한다.

이렇게 불리거나 삶아놓은 다섯 곡식을 찜통에 찌는 것이 오곡밥이다. 찜통에 찌는 이유는, 모두 찰곡식이기 때문이다. 솥에다 밥을 하면 아래의 것들이 짓물러 버린다. 마치 찹쌀로 약식을 하듯, 큰 들통에 면포를 깔고 뒤섞은 오곡을 올린 후 증기로 쪄야 무르지 않고 깨끗하게 잘 익는다.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증기로 찌는 것이므로, 곡식이 덜 불려졌거나 삶지 않아 단단한 속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제대로 익지 않는다. 각각의 곡식을 따로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찰밥은 약간 간이 들어가야 더 맛있다. 그래서 찜통에서 얼추 김이 오른 후에는, 간간하게 소금물을 만들어 위에서 골고루 뿌려 간을 해야 한다. 이러니 오곡밥은, 제대로 하려면,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음식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너덧 식구 먹을 것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는, 구태여 번거로운 찜통을 쓸 필요가 없다. 약식과 찰밥을 할 때처럼 압력솥을 쓰면 편리하다. 충분히 불리고 삶아놓은 곡식들을 압력솥에 안쳐 밥을 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식의 양, 밥물과 가열시간이다. 곡식은 압력솥 깊이의 4분의 1을 넘지 않게 적은 양을 넣고, 밥물은 안쳐놓은 곡식과 같은 수위로 맞춘다. 보통 밥을 지을 때보다는 훨씬 적게 물을 붓는 것이다. 물을 맞춰놓고 약간의 소금을 풀어 간을 맞춘다.

가열시간은, 압력솥의 추가 달랑거리고 돌기 직전까지다. ‘직전’이란 타이밍이 까다로울 수 있으나, 압력솥을 써본 사람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을 끈 후 그대로 압력이 다 빠질 때까지 두면, 그 증기로 찰곡식은 잘 익는다. 압력이 다 빠졌으나 밥솥이 식지는 않은 상태에서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아래와 위를 고루 뒤섞는다. 밑이 눋거나 무르지 않아야 정상이다. 찜통으로 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편리함으로는 단연 추천할 만하다.

다섯 곡식이 화려한 향을 내뿜으며 어우러진 오곡밥은 별 반찬이 필요 없다. 특히 김치는 가장 안 어울리는 반찬이다. 오곡밥과 찰떡궁합은, 기름에 볶은 검은 나물들이다. 고사리·시래기·토란대·호박오가리 등을 고소하게 볶은 것을 오곡밥과 먹으면, 그게 없다면 기름 발라 구운 김만으로도, 밥 한 그릇이 꿀맛이다. 이 맛있는 오곡을 키우느라 고생하는 손들을 생각하며 일 년에 하루라도 감사하게 밥을 지어 먹을 일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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