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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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3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따라오는 자도 곧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예민한 감각은 어둠 너머를 시시각각 수신하고 있었다. 동물은 아니었다. 분명히 사람이 나를 뒤쫓아 나온 것 같았다. 김실장일까?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대신 관음봉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길은 좁고 미끄러웠다. 눈 내리는 어둠 속 관음봉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과연 상대편의 발소리가 금방 멀어졌고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김실장이 나중에 묻는다면, 야간 산행이 제 취미여서요, 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정상에서 가까운 능선길에 도착해서야 암벽 뒤로 몸을 숨기고 아래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만하면 상대편도 따라 오는 걸 포기하고 내려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잠시 후, 나뭇가지들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소리가 났을 뿐 아니라 아예 버젓이 불을 켠 헤드랜턴 불빛까지 보였다. 내 발걸음을 쫓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끈질기고 확신에 찬 발걸음이었다. 나는 바위모서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바닥 밑에 은신했던 말굽이 꿈틀거리면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헤드랜턴이 다가왔다. 나에게 오려면 나의 발밑을 휘돌아 늙은 소나무 등걸을 넘어야 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도망치는 길이 있었고, 그와 당당히 조우하거나 그의 두개골을 부숴뜨리는 길이 있었다. 상대편은 전방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도 없었다. 발밑을 휘돌 때 뛰어내리면서 말굽으로 내려친다면 단번에 그의 두개골을 박살낼 수 있었다. 선택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내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말굽의 충동이었다. 나는 말굽의 충동에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김실장이 아니었다.
나의 시선은 이미 어둠에 충분히 적응되어 있었다. 능선이어서 막힘없이 비치는 관음봉 거리의 가로등 불빛도 도움이 되었다. 김실장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는 207호실의 젊은 순경이었다. 젊기 때문인지 그의 오감 역시 나만큼 예민했다. 내 발밑까지 오더니 암벽 뒤에 은신한 나를 감지한 듯 그가 멈춰 서서 헤드랜턴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앞서 비춰 보였다.
“저예요. 최순경요!”
나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거기 숨어 있는 거 알아요. 나오세요. 이왕 나왔으니 관음봉까지 함께 올라갑시다. 나도 산 속에서 야간 행군 많이 해봤어요.”
젊은 순경의 출현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럼 이 자가 설마 내 방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젊은 순경은 내가 산으로 가는 것을 눈치 채고 따라 나왔다고 했다. 왜 따라 나왔느냐고 물을 차례였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음봉을 행해 앞서 올라갔다. 관음봉 꼭대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은 오는 듯 안 오는 듯 했다. 이내 관음봉 너머 도심의 불빛이 내려다보였다. 어떤 불빛은 붉고 어떤 불빛은 희고 또 어떤 불빛은 푸르스름했다. 내가 관음봉 정수리 바위에 올라앉았고 그가 숨을 헐떡이며 바위에 기대어 섰다. 산의 정수리는 어둠의 고형, 혹은 덩어리를 해체하는 위대성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해체되고, 불빛조차 언제나 하나의 풍경에 불과해졌다. 특히 밤의 정상은 더욱 그랬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 할 말을 미루고 눈발에 부분적으로 지워진 도심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의 빗장을 먼저 연 것은 젊은 순경이었다.

“언제나 뛰어다니나요, 산에서?”
“뛰고 걷고 하지 뭐. 그나저나 왜 나를 쫓아온 거요?”
“문소리가 나자 아저씨가 산으로 가려 한다는 걸 금방 알아챘어요. 한번쯤 함께 오르고 싶었으니까요. 가끔 야간에 산행하신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고요. 샹그리라 앞의 암벽에 올라가는 것도요. 암벽으로 올라갔다면 나는 아마 못 쫓아갔을 거예요. 난 거기 올라가지 못해요. 더구나 이런 밤엔.”
“나를 수상한 사람이라고 여기셨나 보네?”
“아뇨. 수상하다고 생각했다면 아저씨가 아니라, 솔직히 이사장님이지요.”
“우리 이사장님?”
내 목소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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