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버치〉∩〈더블크라임〉= 애슐리 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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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개봉하는 영화를 보면,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이먼 버치〉와 〈더블 크라임〉의 크레딧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이 두 영화 모두 애슐리 저드라는 배우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분명 같은 배우가, 그것도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에 비슷한 역할로 나온다는 점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화나 연기를 한 배우에게나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한 영화에서 이미 본 그 배우를 다시 상영관만 옮겨 비슷한 역할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요.

최근에는 줄리아 로버츠가 〈노팅힐〉과 〈런어웨이 브라이드〉에서 이런 경우를 증명하는 사례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두 영화가 같은 시기에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런어웨이 브라이드〉가 개봉될 당시에도 〈노팅힐〉은 상영되고 있었거든요.

물론 애슐리 저드는 줄리아 로버츠처럼 배우의 지명도로 영화를 좌지우지할만한 영향력은 떨어 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이먼 버치〉와 〈더블 크라임〉은 영화의 장르도 다르지요. 하나는 정통 드라마(〈사이먼 버치〉)이며, 다른 하나는 복수 스릴러(〈더블 크라임〉)입니다.

어쨌든 애슐리 저드가 이 두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아이 엄마입니다. 특이하게도 애슐리 저드는 주목받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 엄마"나 "누구의 부인" 역이었는데, 그의 실제 나이(1968년 4월생)를 고려한 배역이라 해도 이채로운 점이지요. 물론 초창기와
지금은 맡은 역할 자체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이먼 버치〉에서 저드가 맡은 아이 엄마의 성격은 매우 자상하고 부드럽습니다. 자기 아들 조의 친구인 사이먼에게 친어머니 이상의 애정과 감정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이먼이 마음을 의지하며, 정신적인 버팀목으로 신뢰하게 되지요.

한편 〈더블 크라임〉에서 애슐리 저드의 캐릭터는 강인합니다.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아이를 되찾으려는 그의 모습은 모성이 가장 강력한 형태로 발휘되는 경우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 두 편만 보면 애슐리 저드의 역할이 아이 어머니로 고착되는 인상을 주지만, 애초에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주로 "누구의 부인"이라는 캐릭터지요.

그가 한국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긴 두 작품, 즉 〈히트〉와 〈타임 투 킬〉에서 저드는 각각 발 킬머(〈히트〉)와 매튜 맥커너헤이(〈타임 투 킬〉)의 아내 역을 했습니다. 특히 〈히트〉에서 발 킬머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이면서도 마지막에 그를 도망치게 하는 장면의 손짓은 이런 계통의 영화 팬들에게 인상적인 것으로 남았습니다.

사실 "누구 누구의 부인"이라는 캐릭터는 의존적인 캐릭터입니다. 현실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누구 누구의 부인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독자적인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굳이 페미니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많은 여성들이 의식적으로 누구 누구의 부인으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애슐리 저드의 연기 행로를 보면 이런 사회적인 관점의 해석이 매우 적절합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애슐리 저드는 〈스타 트렉〉시리즈 몇 편과 몇몇 TV 영화들에 출연했지만, 그가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스모크〉의 조연이 처음이었고, 〈타임 투 킬〉과 〈히트〉는 그 뒤를 이어 조연으로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연기 초창기에 인정받았던 〈루비 인 파라다이스〉의 독립적인 여성 루비 캐릭터가 있지만, 이것은 인디펜던트 영역에 국한된 것이었지요. 하여튼 "누구 누구의 부인" 뒤에 독자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바로 모건 프리먼과 공연한 〈키스 더 걸〉이었고, 국내에서는 비로소 〈아이 오브 비홀더〉가 공개되면서 애슐리 저드만의 색깔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구현하게 됩니다.

이완 맥그리거와 공연한 이 작품에서 애슐리 저드는 고전적인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 캐릭터를 그 의미에 걸맞게 제대로 구현해 내고 있습니다. 비록 국내 흥행에서 그다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지만, 그의 연기와 캐릭터에 대해 성인 층과 매니아 층에서 보인 반응은 매우 우호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이 오브 비홀더〉는 미국에서 2000년 1월에 개봉할 예정이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미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더블 크라임〉이 성공하는 바람에 애슐리 저드는 이제 주연 배우로서도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비교적 늦깍이(같은 연예인 집안인 귀네스 팰트로와 비교해 본다면 분명 그렇지요)인 저드의 배우 인생은 지금이 초심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한국 팬들에게도 이번 주에 공개되는 〈사이먼 버치〉와 〈더블 크라임〉이 그의 매력을 좀 더 가깝게 어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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