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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순회특파원 ‘이집트 키파야 혁명’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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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6일(현지시간) 히잡 등 이슬람 전통의상 차림의 여성들이 모여 반(反)무바라크 구호를 외치고 있다. [카이로 AP=연합뉴스]


이집트 소요 사태가 6일로 13일째를 맞았다. 반정부 시위대가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 ‘하야(下野)의 날’(Day of Departure)로 선포한 4일(현지시간) 수도 카이로를 비롯한 이집트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숫자는 줄었지만 시위는 다음날에도 이어져 5일 수만 명이 카이로 시내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은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시위대의 압력에 밀려 당장 사임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희망대로 9월까지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튀니지의 독재자였던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처럼 야반도주하듯 대통령궁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거란 전망이 이곳에선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타흐리르 광장 밖의 민심이 그런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다. 열흘 이상 계속된 소요 사태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일상 생활의 피로가 누적되자 “수술도 좋지만 환자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였던 ‘하야의 날’ 시위가 군(軍)이 설치한 방호막 속에서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면서 특히 그런 여론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5일 카이로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제 일상으로 복귀할 때라는 의견을 보였다. 카이로 외곽 지역인 마아디에서 선물가게를 운영하는 모히 나기브(57)는 “일주일째 가게 문을 닫는 바람에 피해가 막심하다”며 “하루빨리 정상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시위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됐고, 무바라크도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이제는 먹고사는 현실 문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나일강에서 놀잇배를 저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라가브 하산(48)은 “일주일째 한 푼도 못 벌어 가족이 굶게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바라크 진영이 잇따라 내놓고 있는 민심수습책도 이런 여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자신의 오른팔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을 내세워 정치 개혁 프로세스에 속도를 내고 있다. 헌법과 선거법 개정을 위한 야권과의 대화에 착수하는 한편 5일에는 집권당 개편도 단행했다. 무바라크 체제를 떠받치는 부패한 만년 여당으로 지탄받아온 국민민주당(NDP)의 사무총장을 경질하면서 아들 가말의 당직도 박탈했다. 이는 법적으로 가말의 대선 출마 자격 상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시위대의 환영을 받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이집트 사태에서 무바라크는 이미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카이로 대학의 한 교수는 “무바라크에게 중요한 것은 ‘명예로운 퇴진’일 뿐 더 이상 권력 유지가 아니다”며 “지금부터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안전한 퇴진을 보장해줄 술레이만 부통령과 군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통제권 밖에 있는 외부 변수를 제외했을 때 앞으로 이집트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야권과의 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최대 야권 조직인 무슬림형제단이나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무바라크 퇴진 전에는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던 입장을 바꿔 야권연합에 참여하고, 5일부터 술레이만 부통령과 대화를 시작한 점은 주목되는 진전이다. 야권이 단결해 헌법과 선거법 개정을 이뤄냄으로써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기틀을 마련하느냐에 이집트 사태의 향배가 달려 있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집트는 이슬람국가이면서도 세속주의에 입각한 다원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터키의 모델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는 물론이고 아랍권 전체를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다.

 야권이 사분오열(四分五裂)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혼란 수습을 구실로 군을 중심으로 제2의 무바라크가 등장해 권위주의적 체제를 이어가는 것은 이집트 국민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정치 협상이 진행되는 향후 2~3개월이 이집트 사태의 가닥을 잡는 결정적 시기가 될 전망이다.

배명복 순회특파원

◆키파야(Kifaya) =키파야는 아랍어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30년 장기 집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의미의 시위 구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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