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이 부처가 되고 부처가 똥이 되는 ‘윤회’의 세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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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05면

음악, 미술, 무용에 ‘현대’라는 말을 붙여 보자. 현대 음악, 현대 미술, 현대 무용…. 왠지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왜일까. ‘현대’ 혹은 ‘동시대성(Contemporary)’이라는 말이 붙으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와야 하는 게 아닐까. 말을 좀 바꿔 보자. 이때 ‘어렵다’는 느낌은 ‘익숙하지 않다’라는 뜻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늘 듣고 보아오던 것이 아닌, 낯선 예술가의 새로운 문법-. 하지만 새로움 없이 어찌 발전이 있으랴.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철학이 얼마나 담겨 있으며, 그것이 예술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하고, 그러면서 또 어떻게 대중의 호응을 얻어내느냐일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창단공연‘블랙박스’, 1월 29~3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철학 있는 무용’으로 ‘무용의 대중화’를 강조해온 안무가 홍승엽(49)의 고민도 그와 무관치 않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 무용은 생소한 창작입니다. 어려운 게 맞아요. 하지만 베토벤·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려워도 듣잖아요. 듣고 있으면 행복하고 즐겁다고 느끼죠. ‘어렵다’ ‘쉽다’는 머리로 판단하는 거지만, ‘좋다’ ‘싫다’는 가슴이 판단하는 거예요. 관객은 좋은 작품을 보면 몰입하게 되고 순수예술만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죠. ‘사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재밌어’라는 것과 비슷한 감정입니다.”

지난해 8월 창단된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서 짧은 기간에 창단공연으로 준비한 ‘블랙박스’(1월 29~3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는 그런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몰입하게 할 것인가. 그는 ‘동시대적’ 감성을 최대한 집어넣는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바로 이미지와 사운드다.

‘블랙박스’는 사실상 홍승엽 안무의 갈라쇼다. 1999년 ‘달을 보는 개’부터 2010년 ‘벽오금학’에 이르는 8편의 작품에서 이른바 ‘앙꼬’만 모았다. 23명의 남녀 무용수가 2시간30분간(중간에 휴식시간이 20분 있다) 풀어내는 팽팽한 긴장감과 격렬한 역동성에 힘을 더하는 것은 강렬한 빛과 선명한 색, 그리고 개성 있는 사운드다.

어느새 무대가 시작되면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 이 어둠을 뚫고 객석 왼쪽 통로를 따라 갓을 쓴 전등(을 든 무용수) 하나가 둥실둥실 내려온다. 서치라이트처럼 객석을 비추더니 다시 무대를 비추다가 암전. 그리고 2001년 작 ‘빨간 부처’에 등장했던 ‘야단법석’의 한 장면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전체적으로 그의 무대는 설치 미술이었고 무용수들은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닥에 하나씩 깐 하얀 방석 80개 위로 80개의 조명이 비춰졌다. 8명의 무용수가 각기 뒤돌아서서 다리 가랑이 사이로 기다란 갈색의 무언가를 하나씩 떨어뜨렸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던 관객 사이에 웃음이 파도처럼 번져갔다. ‘빨간 부처’ 중 ‘똥부처, 부처똥’이다. 목탁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무용수들은 그 덩어리를 척척 주물러 사람 형태로 빚어냈다. 그렇게 똥이 부처가 되고 부처가 똥이 되며 모든 것은 허공 속 한 줌의 흙덩이로 돌아갔다. 삼라만상의 윤회가 그렇게 무심하듯.

민소매 셔츠와 짧은 팬츠, 덧신까지 새빨간 색으로 맞춘 무용수들이 펼쳐 보이는 ‘싸이프리카’(2004년 작)의 장면들은 강렬했다. 블랙과 레드의 대비가 선명한 덕분이다. 미디어 파사드 방식으로 영상과 몸짓을 조화시키며 즉석에서 플렉시글라스 위에 그림까지 그려낸 ‘데자뷔’(2000년 작)도 독특했다. 회색 죄수복 같은 차림에 얼굴에는 기다란 고깔을 쓰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묘사한 ‘아Q’(2006년 작)의 한 장면 역시 눈길을 끌었다.

사운드도 몸짓과 어울렸다. 무대 상단에 빨간 실을 하나씩 연결한 ‘벽오금학’에서는 경쾌한 기타 소리가 붉은 실들의 팽팽한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LP판이 지직대는 소리, 말들의 숨소리, 전자파리채에 벌레가 타 죽는 듯한 소리 등이 특히 그랬다.

무엇보다 객석과의 소통을 고려한 구성은 돋보였다. 수십 명이 무대 끝에 걸터앉아 객석을 향해 몸짓을 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군무가 마무리될 때 무용수 중 하나는 꼭 객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똥부처, 부처똥’에서 마지막으로 덩어리를 떨어뜨리던 무용수도 슬쩍 턱을 꼬더니 객석을 쳐다보았다. ‘이게 뭔지 아셨나요’ 하는 듯한 포즈로. 가장 큰 웃음이 터진 순간이었다. 안무가 홍승엽이 객석과 소통하는 방식인 듯했다.

다만 갈라쇼를 표방한 만큼 전체적인 작품의 통일성은 미약했다. “깊이도 크기도 알 수 없는, 춤으로 가득 찬 검은 창고에서 꺼낸” 홍승엽의 ‘블랙박스’는 “본래 그런 모습인 양 시치미를 떼고” 있었을 뿐이다. 8월 6일과 7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홍승엽 감독의 안무로 펼쳐지는 국립현대무용단의 두 번째 정기공연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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