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FTA, 빨리빨리보다 만만디 전략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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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31면

우여곡절은 겪겠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한·EU FTA가 올해 비준된다고 본다면, 이명박 정부 후반기의 최대 통상 현안은 한·중 FTA를 어떻게 하느냐다. 한·중 양국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FTA에 관한 연구를 수년간 진행해 왔고, 중국은 한국에 FTA 추진 여부 결정을 재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조속추진론과 시기상조론이 바로 그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는 와중에 고도성장을 지속한 중국은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다. 조속추진론은 중국이 ‘세계의 시장’으로 급부상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걸 근거로 삼고 있다. 지난해 한국 제조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이 중국과 FTA를 체결한 것도 한·중 FTA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된다.
이에 반해 한·중 FTA가 성급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대중 무역의존도가 이미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한·미, 한·EU FTA를 발효시켜 그 효과를 실현한 다음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둘째, 대중 수출의 대부분이 현지 투자 기업으로의 원자재 또는 중간재 수출이고, 이들은 이미 낮은 관세로 수출되고 있어 FTA를 통한 경제적 실익이 약하다는 것이다.

셋째, 한·중 FTA를 하게 되면 중국의 값싼 농산물이 물밀듯 들어와 농업 분야의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고, 식품안전성이 검증 안 된 먹을거리들이 국민건강권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 중국은 무엇인가.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최대 교역 파트너가 됐다. 미·EU를 합쳐야 대중국 교역액에 상응할 만큼 ‘수출시장’ 중국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동시에 중국은 한국의 최대 투자대상국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해 중국 대륙을 글로벌 생산기지로 만들었다. 중국은 한국의 자본과 상품을 흡수하는 거대한 용광로다.

그러나 중국은 더 이상 저임금으로 무장한 ‘세계의 공장’이 아니다. 중국으로 갔던 많은 한국 기업이 다른 개도국으로 옮겨갔거나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은 자동차·조선·철강 등 주요 수출산업에서 빠른 속도로 한국을 추격해 오고 있다.

최근 필자와 만난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 대사는 중국으로의 기술유출에 대한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굳이 그 내용을 에둘러 인용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맘만 먹는다면 외국 기업들의 지적재산권도, 영업비밀도 결코 무사할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중국은 왜 한국과 FTA를 하고 싶어 하는가. 무엇보다 한국이 매력적인 수출시장이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다 한·미 FTA, 한·EU FTA가 발효되면 한국을 허브로 삼아 세계 최대의 양대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할 지름길이 생긴다.

농업 피해, 국민건강권 침해에 대한 우려는 그간의 FTA 추진 과정에서도 논쟁거리였다. 이런 우려에 대해선 협상을 통한 1차 방어막, 국내 정책을 통한 2차 방어막을 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한·중 FTA를 결심하려면 중국이 서비스·투자·지적재산권·분쟁해결 등 한국의 관심사항에 대한 협상 의지를 명확하게 밝혀줘야 한다. 그래야만 한·중 FTA를 할 것인지, 어떤 형태의 FTA를 할 것인지 논의를 집중할 수 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다. 협상 의제가 협상 당사자들의 관심과 목표를 적절하고 균형되게 반영해야만 ‘윈-윈’할 수 있는 협상이 가능해진다. 중국은 뉴질랜드 외에 선진국과 FTA를 체결한 적이 없다. 개도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도구로써 FTA를 활용해 왔다. 서비스 개방, 투자 규범 강화 등 선진국이 관심을 보이는 의제에 대해 중국은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한국이 중국과의 FTA를 미적거리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일각에서는 낮은 수준이라도 좋으니 한·중 FTA를 일단 타결한 다음, 나중에 한국의 관심사인 서비스·투자 등에 대한 협상을 추진하는 2단계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이것이야 말로 중국의 ‘만만디(慢慢的·천천히)’ 전술에 말려들어 가는 방식이다. 필자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 가운데 FTA가 좀 더 급한 쪽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외치 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집권 후반기의 조급증을 버려야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때로는 한국식 ‘빨리빨리’가 사태를 꼬이게 한다. 한·중 FTA 첫 단추를 꿰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만만디’는 중국만 쓸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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