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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의 희생, 기성용의 세리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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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도쿄특파원

#1 사회자도 울고 통역도 울었다. 높으신 귀빈들도, 청바지 차림의 대학생들도 펑펑 눈물을 흘렸다. 취재 온 일본 기자들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지난주 26일 오후 도쿄에서 열린 ‘고 이수현 10주기 추모 행사’. 이씨의 부친 이성대씨는 아들과의 기억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욕심도 많던 내 아들 수현이. 초등학교 때는 소풍 때 도시락 못 싸오는 친구를 위해 대신 도시락을 싸가고, 고등학교 때는 군고구마 파는 학생에게 자신의 점퍼를 벗어주고, 대학교 때는 자전거에 부딪쳐 쓰러진 한 할머니를 둘러업고 병원까지 달려가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죽어서 수현이는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훈장 받는 아이보다 평범해도 그냥 부모 곁에서 탈없이 살아주는 아이였으면 하는 게 부모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난 일본의 많은 시민이 수현이를 오랫동안 애도해 주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현이도 외롭지 않게 하늘나라로 갈 수 있었을 겁니다.”

 고려대 재학 중 일본에 어학연수를 간 이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18분쯤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26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이씨를 기리며 기부를 한 일본인 수는 이미 1만 명이 넘었다. 일본 정부는 곧 이씨의 기념비와 흉상을 건립할 계획이라 한다. 1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인들이 이씨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옆자리에 앉은 50대 일본 여성은 “감동 때문”이라고 했다.

 #2 얼마 전 한·일 축구시합에서 기성용 선수의 골 세리머니가 논란이 됐다. 원숭이 흉내를 낸 것이 일본을 모독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왜 일본 응원단은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들고 나왔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경위야 어떻건 난 그 세리머니는 분명 잘못됐다고 본다. 하지만 정작 내가 주목한 것은 양국 국민의 대응이었다. 한국은 냉정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했고, ‘피해자’인 일본도 흥분하지 않았다. 뭐 하나 있으면 양국이 화끈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던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본의 저명 방송인인 미노 몬타는 TV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이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기성용 선수의 세리머니가 나오게 된 뿌리를 일본인들도 잘 자각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대다수 일반 시민의 반응도 “한국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변화다.

 공교롭게도 골 세리머니가 문제가 된 날은 이씨의 10주기였다. 이날 이씨의 10주기 행사에 NHK가 중계차를 동원하고 주요 신문이 1면에 관련 기사를 싣는, 그리고 문제의 골 세리머니를 오히려 자성의 계기로 삼는 일본 내 상황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심은 상대방의 강한 믿음과 진한 감동을 낳는 법이다. 이수현이 일찍이 10년 전 일본에 심은 그 믿음과 감동이 이제는 두 나라 국민의 강한 고리로 승화되고 있음을 우리는 지금 확인하고 있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