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127시간’] 바위 틈에 팔 낀 사내의 사투, 눈돌릴 틈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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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27시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연기를 펼친 제임스 프랑코. 28일 LA에서 열리는 제83회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암벽 등반에 나선 한 남자가 팔이 바위에 끼는 사고를 당한다. 옴쭉달싹 못하게 된 그가 가진 거라곤 산악용 로프와 칼, 물 한 병,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뿐. 남자는 127시간, 즉 닷새하고도 7시간 동안 무시무시한 통증과 허기, 갈증에 시달리며 사투를 벌인다.

 이런 얘기를 들은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법하다. 하지만 영화로 잘 만드는 건 또 다른 얘기다. 장소가 한정돼 있고 배우는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에서 애런 랠스턴이라는 청년에게 일어난 실화를 영화화한 ‘127시간’은 이런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냈다. ‘무결점의 영화’(뉴욕타임스) 등의 극찬이 쏟아졌고, 제작비 30만 달러(약 3억4000만원)를 지난해 말 개봉 사흘 만에 회수했다.

 감독이 대니 보일(55)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승산 없는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트레인스포팅’‘셸로우 그레이브’ 등으로 1990년대 혜성과 같이 등장했고, 2008년 평범한 퀴즈쇼를 한 빈민가 소년의 인생역전극으로 포장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쓸었던 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작가 사이먼 부포이, 작곡가 A R 라함이 재회한 이번 작품도 전조(前兆)가 심상치 않다. 28일(한국시간) 열릴 제8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캐릭터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쪽보다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데 훨씬 발군인 보일의 스타일은 ‘127시간’에서도 여전하다. “돌겠네, 정말”이라는 애런(제임스 프랑코)의 대사처럼 처음엔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상황을 보여주다가, 한심스럽게 살아온 과거를 후회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다 혹시나 싶어 칼로 바위를 갈기도 하고, 마비상태에 이른 팔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이래서 싸구려 중국산 칼이 아니라 스위스제를 사야 돼”식의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데선 웃음도 나오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팔을 잘라내야 하는 장면에선 탄식도 터진다.

 달아날 듯 달아날 듯싶은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놓는 건 감각적인 화면과 귀를 파고드는 선곡이다. 대니 보일 감독은 추상언어를 영상언어로 전환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외로움과 절망, 후회와 체념 등이 바람과 태양, 먼지 등의 기후 변화를 잡아낸 섬세한 영상과 다양한 플래시백(과거 회상)속에 넘실댄다. 아버지와 함께 보던 어린 시절의 해돋이, 누이동생의 피아노 연주 등 가족에 대한 회상, 심지어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미래에 대한 환시(幻視) 등등. 실화의 감동을 넘어서는 영화의 표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1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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