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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의 크리에이터 ③ 안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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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다음 달 1일 개막하는 창작 뮤지컬 ‘천국의 눈물’ 최종 리허설을 하느라 이란영씨는 “정신 쏙 빠진 상태”라고 했다. 사진을 찍자는 말에 “춤의 역동성을 담으면서도, 직접 무대에 서는 무용수가 아닌 안무가의 느낌을 살리기가 쉽지 않다”라며 포즈를 취했다. [오종택 기자]

압도적이었다. 뮤지컬 배우 150명 설문 조사에 의해 결정되는 ‘무대 위의 크리에이터’ 3회 안무가편의 승부는 싱거웠다. “누가 국내 최고의 안무가라고 생각하는가”란 설문에 응답 배우 절반 이상이 이란영(42)씨를 택했다. 77표를 획득, 여유 있게 1위에 올랐다.

 배우들의 추천 사유도 칭찬 일색이었다. “신선하고 역동적이며 ‘엣지’있다” “춤이 곧 연기임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등은 얌전한 편이다. “중력을 무시한 안무 스타일, 배우는 힘들지만 관객은 호강한다” 같은 평론가 수준의 코멘트도 있었다. 안무가 이란영에 대한 배우들의 애정이 묻어났다. 이에 대해 정작 본인은 “말이 서툴러 어떻게 표현할지, 차라리 춤을 추라면 하겠는데…”라며 웃었다.

 노래와 춤의 앙상블인 뮤지컬. 그간 국내에서 춤은 이상하게도 보조장치로 여겨져 왔다. 음악이 중심인 터라 춤이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씨는 그런 안무를 제자리에 올려놓은 주역이다. 춤을 노래 못지 않은 독자영역으로 정착시켰다. 그의 역량이 가장 강렬하게 발휘된 작품은 2007년 ‘뷰티풀 게임’이다. 11명이 뛰는 축구 장면을 파워풀한 동작으로 구성해 “한국 뮤지컬 안무의 새 지평을 열었다”란 호평을 받았다.

 “처음엔 ‘여자가 축구 모르잖아’라며 반대가 많았어요. 오기가 생겨 6개월이나 매달렸죠. 축구장에도 숱하게 갔는데 너무 재미 없어 하품만 나오는 거에요. 포기할까 하다, 텔레비전으로 보는데 뭐가 휙- 지나가더라고요. ‘클로즈업’이었죠. 대중 역시 TV화면에 포착된 밀착축구만 알지, 경기 전체를 보는 거는 아니구나 생각했죠.”

 실마리가 풀리니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하나의 모티브를 잡아 그걸 확대시키는 안무 스타일을 완성했다. “장면은 줌 렌즈로 잡듯 숨소리까지 전해주되 동작엔 박진감과 스피드를 담으려했죠.” 이 작품으로 그는 본지와 한국뮤지컬협회가 공동 주최하고 있는 ‘제2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안무상을 받았다.

이씨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1남4녀 중 막내였다. 춤에 발동이 걸린 건 다소 늦은 편이다. 순천여고에 들어가면서 발레를 시작했고, 세종대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영 재미를 느끼지 못했단다.

 “춤 추는 건 좋았지만 규격화된 발레가 숨을 조여오는 듯했어요. 겉돌았죠. 대학교 4학년 때 ‘카르멘시타’라는 뮤지컬에 코러스로 우연히 출연했는데, 우와- 누군가와 사랑을 하듯 홀딱 반하게 되더라고요.”

 그때가 1990년이었다. 당시엔 ‘캣츠’ ‘코러스라인’ 아가씨와 건달들’ 등 춤 위주의 뮤지컬 제작이 한창인 때였다. 발레리나 출신 뮤지컬 배우 이란영의 활동 폭도 그만큼 넓을 수 있었다. 주연까지 꿰차며 7년간 활발히 무대를 뛰어다녔다. “1998년인가 그쯤 일에요. ‘페임’에 당시 신인인 김선영과 쏘냐가 딱 나와 노래하는데, ‘난 어떻게 해도 쟤네 못 이기겠다’란 생각이 섬광처럼 스치더라고요.”

 이씨는 그 길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 런던 스튜디오 센터에서 본격 안무 수업을 받았다. “그때 3년간 배운 걸로 지금까지 써 먹는 거예요. 춤이 결코 과장되거나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쇼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죠”라고 했다. “나를 내려놓을수록 자유로워지고, 거기서 내가 원하는 걸 막 꺼내놓을 수 있었어요. 춤은 결국 발이 아닌 심장으로 추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는 내년에 연출가로 데뷔할 예정이다. 밥 포시·제롬 로빈슨·수전 스트로만 등 미국에선 안무가 출신의 연출가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팔 하나를 뻗는 것만으로도 사연을 담고 싶어요. 인간의 몸 그 자체가 드라마니까요.”

글=최민우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이란영 주요 안무작

2003년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5년 ‘겨울나그네’ ‘하드락 카페’

2007년 ‘햄릿’ ‘뷰티풀 게임’

2008년 ‘컴퍼니’

2009년 ‘삼총사’ ‘영웅’

2010년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2011년 ‘천국의 눈물’

다른 안무가는 …

35표를 얻어 2위를 차지한 서병구씨는 국내 뮤지컬 1세대 안무가다. 이란영·강옥순 등 최근 활동 중인 안무가 대다수가 그의 제자다. 1993년 안무가로 데뷔해 ‘스타가 될거야’ ‘명성황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에 참여했다. 안무와 연출을 번갈아 하며 현재도 왕성히 무대 작업 중이다.

 3위는 오재익씨가 선정됐다. ‘남한산성’ 등에서 굵직한 남성미를 선보여왔다. 오씨 역시 최근 ‘웰컴 투 마이 월드’에서 연출가로 데뷔했다.

 4위는 ‘금발이 너무해’ ‘라디오 스타’의 강옥순씨다. 감각과 유머를 적절히 녹여낸다는 평이다. 5위는 ‘로미오 앤 줄리엣’으로 2009년 한국뮤지컬대상 안무상을 받은 최인숙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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