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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후 수도권 대책 어떻게 바뀌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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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도 서울의 평균지가는 전국 평균의 1백배에 달한다. 교통난·환경오염은 더욱 말이 아니다.
서울도심의 평균주행속도는 80년 시속 30.8km이던 것이 89년엔 18.7km로 낮아졌고, 지금도 그 정도 수준이다.
수조원 빚을 지며 대규모 지하철망을 건설했는데도 교통흐름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전국 국도 隘路구간의 90%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등 수도권의 비효율·낭비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해방되던 해 90만명에 불과하던 서울 인구는 6·25전쟁이 터진 50년엔 1백69만명으로 늘어났다. 그 후 전쟁으로 더욱 피폐해진 농촌을 사람들은 또 떠났다. 60년말 서울인구는 2백44만명. 여기엔 6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추구 정책이 한몫했다.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공업화로 생성되는 일자리는 대부분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향도이촌(向都離村)
의 민족 대이동은 그칠 줄 몰랐다.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이 몰려 있는 서울은 청년들에겐 모험·기회·약속의 땅이었다. 1년에 30만명씩 몰리는 서울은 만원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수도권엔 전국 대비 11.8%에 불과한 면적에 45.3%에 달하는 인구가 몰려 산다. 공공기관의 90%, 100대 기업 중 95개가 수도권에 있다. 60년대에 전국인구의 20.8%에 불과했던 수도권(서울은 9.8%)
은 그 동안 나라 전체의 인구증가분을 모두 감당했다. 늘어나는 인구의 대부분이 수도권 인구 증가분이라는 뜻이다.

91년도 서울의 평균지가는 전국평균의 1백배에 달하고, 교통난·환경오염은 더욱 말이 아니다. 서울도심의 평균주행속도는 80년 시속 30.8km이던 것이 89년엔 18.7km로 낮아졌고, 지금도 그 정도 수준이다. 수조원 빚을 지며 대규모 지하철망을 건설했는데도 교통흐름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전국 국도 애로(隘路)
구간의 90%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등 수도권의 비효율과 낭비는 헤아리기 힘들다.

수도권 집중에는 정치적·심리적 차원의 부정적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휴전선에서 40km밖에 안 되는 서울에 집중투자를 계속하는 게 옳은 정책인가. 지역간 위화감은 물론 농촌지역의 개발잠재력과 정주기반을 약화시키는 수도권 일변도 정책은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60년대 이래 수도권 중심 국토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수차례 거론했지만 대부분 물거품이 됐다. 또 69개 기관을 수도권 밖으로 옮기겠다고 계획했지만 실제는 25개 기관 이전에 그쳐 ‘구호성’이었음을 나타낸다.

정부는 64년에 처음 “이래선 안 되겠다”고 느꼈다. 그해 국무회의는 ‘대도시 인구집중방지책’을 통과시켰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인구가 5백만명을 넘게 되자 정부는 ▷69년 청와대 정무비서관실의 수도권인구집중 억제방안(그린벨트 설정·중앙관서 지방이전 등)
▷70년 지방공업개발법(지방공단 입주공장에 소득세·법인세 3년간 면제)
▷71년 개발제한구역 설정 ▷72년 건폐율규정 강화 및 토지거래허가제 도입 ▷73년 주민세법, 지방이전공장 양도세 등 면제, 수도권내 공장 신증설시 5배 중과세 ▷74년 서울 강북지역 중·고교 신설 억제 ▷75년 서울시내 공장신증축 억제 등 서울인구유입을 억제할 만한 대책을 계속 발표했다.

그래도 서울인구는 계속 불어났다. 7백50만명을 넘어선 75년, 정부는 무임소장관실을 만들어 수도권 인구문제를 전담토록 하는 한편, 다음해엔 ‘수도권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또한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천도론(遷都論)
까지 등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77년 대통령연두기자회견에서 임시행정수도건설을 처음 언급했고, 그 후 수도이전 계획은 일반인에겐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채 정부 일각에서 진행됐다.

◆ 5대 신도시 건설로 치명타 맞은 수도권정책

그 중 백미(白眉)
는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던 오원철(吳源哲)
씨가 주도한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다. “수도권 집중문제를 해결하자”는 차원의 천도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말 그대로 국토의 중심을 바꾸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랄 만한 꿈 같은 계획서를 오씨는 작성한 것이다.

그대로만 됐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완전히 딴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토의 운명 때문인가. 70년대말 격변의 시대는 이 계획서를 날려 버렸고, 그 결과 수도권은 지금까지도 국토의 중심으로 건재하고 있다.

오씨의 꿈을 앗아간 80년대초 격변의 시대. 우리 경제는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4.8%)
을 기록했다. 투자는 위축되고, 정치·사회 각 부문은 불안했으며, 국민의 욕구와 갈등은 날로 더해 갔다. 세계 석유수출기구의 유가인상정책으로 국내 석유류 제품가격은 일시에 올라 그해 도매물가 상승율은 39%에 달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이라크전쟁, 각종 폭력 도발로 세계 평화마저 크게 유린되던 시기였다.

수도권은 어찌 됐을까. 6백30만명이 목표치였던 81년 서울인구는 8백68만명이나 됐다.‘격변’이 없었다면 750만명 수준일 것으로 예측되던 서울인구가 혼란을 틈타 오히려 더욱 늘어난 것. 기타 수도권도 마찬가지였다. 81년 수도권 인구는 1천98만명이던 목표치를 절반이나 뛰어넘어 1천4백75만명에 달했다.

이같은 인구 폭발로 더욱 혼란스러워진 수도권을 향해 5공정부는 대학생 정원을 무조건 30% 늘리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 결과 수도권 학생수는 80년 2백54만6천명(전국 학생수의 43.3%)
에서 90년 5백70만6천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전국의 54.7%)
.

정부는 한편으론 수도권 정비를 추진했다. 82년 입법화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수도권 정비기본계획은 수도권을 다섯개 권역으로 나눠 어디는 개발할 수 있고, 어디는 절대 안 되고 하는 식이었다. 정부는 서울 등 수도권 인구집중지역에 각종 개발행위를 물리적으로 제한했고, 특히 인구집중을 유발할 시설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구영향평가를 요구했다. 행정·입법·사법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청사 신증설은 물론 정부투자기관 및 기업체 본사사옥까지 수도권에서 원칙적으로 건축이 금지됐다.

얼핏보면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 같은 수도권 정책은 외적인 변수로 인해 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서울올림픽이다. 강력한 개발규제로 주춤할 듯하던 서울은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자 또다시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잠실벌을 비롯한 동부 서울엔 개발 붐이 불기 시작했고, 투기열풍은 곧 전국으로 번졌다. 까마득하던 마천동·거여동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지하철 2호선, 올림픽 대로 등 건설에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투입한 돈이 총 2조3천8백26억원. 경기장·국제방송센터 건립 등 직접투자에 7천4백73억원, 김포공항 확장, 가로수 정비 등 교통·환경 여건조성에 1조2천7백42억원이 들어갔다.이 중 정부재원은 54%인 1조2천8백54억원.

이 돈의 생산유발효과는 4조7천5백4억원, 소득유발효과도 1조8천4백62억원, 고용유발효과는 33만6천명이나 됐다. 주로 건설부문이 큰 덕을 봤다. 84년 17개이던 서울의 특급호텔은 88년 26개로 늘어나기도 했다(자료:서울올림픽의 의의와 성과, 한국개발연구원, 89.3)
.

수도권과 지방의 경제력을 비교한 지역격차·갈등문제가 다시 불거졌고, 결국 정부는 89년 총리실에 수도권대책 실무기획단을 설치했다. 이 조직은 곧 청와대 지역발전균형기획단으로 격을 높였고, 수도권 규제는 다시 강화됐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 의지는 ‘5대 신도시’ 건설로 단숨에 물거품이 됐다. 주택 2백만호 건설을 목표로 내건 6공정부는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수도권 5곳에 거대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신규고용창출 45만명, 고용파급효과는 전국적으로 1백74만명에 달하고, 총생산파급효과는 8조6천억원이나 되는 매머드 투자사업이었다. 재산세 수입만 해도 건설기간 중(92~96년)
8천2백50억원, 건설 후엔 매년 1천2백억원씩 걷힐 프로젝트였다.

신도시와 서울을 잇는 인프라에 대한 투자도 한동안 계속됐다. 공사가 있는 곳에 돈이 있고 그곳에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어서 수도권 비대화는 점점 골이 깊어갔다.

갑작스레 대규모로 시작한 공사라 건설인력·자재난 등 후유증도 심각했다. 건설인력 임금은 86∼88년 중 연간 17%씩 상승했으나 89년에는 31%, 90년엔 40%나 올랐다. 부동산시장도 과열되고 통화량도 늘어나 궁극적으론 소비자물가 상승을 가져왔다. 합리적인 주택투자규모는 GNP의 6% 수준인데, 5대 신도시 건설기간 동안 90년엔 8%, 91년엔 9%에 달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방법에만 의존한 80년대 수도권 규제시책은 집중분산은커녕 오히려 규제를 피하기 위한 각종 탈법·불법·편법만 유도하는 등 부작용을 양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수도권내 공장의 절반 이상이 불법·무허가 공장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정부 시책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수도권 내부의 과밀·과소문제도 부각됐다. 잘사는 수도권, 못사는 수도권 문제는 선거 때마다 이슈로 등장했고, 90년대엔 어떻게든 “수도권을 풀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전문가들 사이에도 형성됐다.

YS정부는 또 ‘세계화’를 주창했다. 세계화의 위치적 중심은 누가 봐도 수도권이었기 때문에 수도권의 규제는 하나둘 풀렸다. 94년 정부는 수도권을 3개권역으로 재분류했고, 규제수단도 직접적·물리적인 방법이 아닌 간접적·경제적인 수단으로 바꿨다. 수도권을 인구집중억제 대상지역에서 해방시킨 셈이다.

여기에 국민의 정부는 한술 더 뜬다. 토지관련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토지공개념을 패퇴시켰고, 수도권을 비롯 대도시권 그린벨트를 대폭 해제하는 방침도 밝혔다. 우리 국토가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논리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민간부문 경쟁력을 활성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권 땅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제 수도권은 국토의 관문으로 다시 자리잡는 중이다. 영종도에 새로운 국제공항이 들어서고 경부고속철도까지 생기면 서울과 수도권의 국토경쟁력은 훨씬 강해진다. 그러나 그 결과에 따른 비효율·낭비엔 여전히 무감각하다. 몇년 안 가 전문가들은 또다시 서울과 지방의 소득격차를 논하며 ‘수도권정비’를 주장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음성직 중앙일보 전문위원] 월간중앙 제 288호 199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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