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모반을 꿈꾼 일곱 명의 서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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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새재 주흘관(主屹關)의 모습 : 문경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관문이자 요새였다. 박응서 일행은 이곳을 통해 왜관을 왕래하던 은상(銀商)을 살해해 모반을 위한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자료:문화재청 홈페이지]

1613년(광해군 5) 3월 박응서(朴應犀) 등이 이끄는 한 무리의 서자(庶子)들이 문경 새재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들이 노린 대상은 서울과 부산의 왜관(倭館)을 왕래하면서 장사하던 상인이었다. 박응서 등은 상인을 죽이고 그가 갖고 있던 은화 수백 냥을 빼앗았다. 박응서 등은 빼앗은 은을 밑천으로 무사들을 끌어 모아 대궐을 공격하는 역모를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응서 일행은 포도청에 체포되고 만다. 신문 과정에서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박응서·박치의(朴致毅)·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허홍인(許弘仁)·김경손(金慶孫) 등 일곱 명은 모두 양반가의 서자들이었다. 칠서(七庶)라 불렸던 이들은 서자라는 굴레 때문에 벼슬길이 막힌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여강(驪江) 등지에 함께 모여 살며 거사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광해군과 조정은 연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칠서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닿는 자들은 모두 잡아들여 닦달했다.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고 죽어나가는 관련자들이 속출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칠서들의 원한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열네 살이던 심우영의 아들 섭(燮)은 “아비가 늘 ‘이 나라에서는 쉬운 일이 없으니 네가 크면 누르하치를 불러와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만주족 군대를 끌어들여서라도 서얼 차별의 원한을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 시작된 서얼 차별은 가혹했다. 서얼들은 문과와 무과는 물론 생원과 진사시조차 응시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부친이 적자(嫡子) 형제를 남기지 않고 죽었을 때에도 서자들은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제사와 상속에서 부친의 조카들에게도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원한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얼들을 금고(禁錮)시키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핏줄이 미천해도 재주만 보고 등용하던 중국의 현실을 목도했던 조헌(趙憲)은 ‘우리나라의 고위 관리들이 단지 자기 자손만을 염려할 뿐, 서얼 차별을 통해 인재를 잃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통탄한 바 있다. 또 임진전쟁 등을 계기로 서자들이 무관직으로 대거 진출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문관직에서의 차별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다.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불렸던 박응서 등의 모반 시도는 그 같은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이 죽고 인목대비(광해군의 계모)가 유폐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훗날 광해군 또한 그 후유증에 휘말려 왕위에서 밀려난다. 칠서들이 품었던 원한의 파장은 깊고도 길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