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1)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6

길고 너른 식탁이었다. 음식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내가 들어올 때 나간 두 남자가 아마 음식을 배달해 왔던가 보았다. 푸짐하진 않았으나 생선회를 중심으로 한 깔끔하고 세련된 식단이었다. 흰 식탁보 위에 고급 자기접시들과 크리스털 유리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나비처럼 날렵하게 접혀 놓인 냅킨의 흰빛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린이 입은 드레스 색깔보다 소박한 흰빛이었다. 저무는 운악산 정수리와 그로부터 옹골차게 뻗어나간 산줄기가 너른 창으로 막힘없이 들어왔다.

“두 사람, 법명이 관음과 세지라 했지?”
이사장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더 은은했다.
“계를 받고 사홍서원을 바쳤으니 형식은 불도(佛道)에 든 셈이나 분심(分心)이 크면 다 공염불이야. 불성(佛性)은 형식의 감옥에 있지 않네. 부처님도 그랬거든. 분명히 열반(涅槃)과 열반에 가는 길이 있고 교설(敎說)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는 열반에 이르는 이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는바, 그것만은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다만 나는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관음아, 네게 길을 가리키는 이는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사장님요!”
애기보살은 막힘이 전혀 없었다.
이사장이 큰 소리로 껄껄 웃었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눈치껏 박수를 쳤다. 분위기가 보다 화기애애해졌다. 세지보살인 여린은 미소만 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사장의 말이 ‘의식’에 이르렀다. 유물론자들은 의식을 ‘뇌수’에 의해 생겨난 결과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라고 이사장은 말했다. 객체도 알고 보면 주체의 심상에 맺힌 존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주체인 의식이 분산되지만 않는다면 마침내 객체인 육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였다.

육체는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유동적 에너지와 정보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의식을 통해 얼마든지 세포의 노화를 촉진시킬 수도, 방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예컨대, 인도나 티베트의 수행자들은 요가를 통해 체온을 마음대로 조절해 극단적인 혹한(酷寒)이나 혹서(酷暑)를 이겨낼 수 있고, 피지군도나 스리랑카의 수행자들은 전혀 데지 않고 불 위를 걸어갈 뿐 아니라, 우리의 만신들은 신체적 단련을 하지 않고도 시퍼런 작도 위에서 맨발로 춤춘다는 것이었다.

“내 육체가 서른 살이라면 믿을 수 있나?”
이사장의 시선이 불현듯 내게로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어제 병원에서 나의 신체나이를 측정해봤는데 놀랍게도 서른 살이라는 값이 나왔어. 어떤 사람은 내 얼굴의 주름살을 보고 예순이나 일흔이 훨씬 넘었다고 하는 판인데. 헛, 이 얼굴 주름살도 그렇지, 내가 조절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그 말이야. 이사장인 내가 얼굴부터 서른 살처럼 보여봐. 누가 내 말을 귀담아 듣겠어? 저절로 된 게 아니라고. 나는 서른 살의 몸과 일흔 살의 얼굴을 원했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그걸 얻었어. 사실이야. 자네는 어떤가, 지금 내 말?”
“…….”

“나를, 믿나?”
“예에, 이사장님…….”
나는 이사장의 시선을 피하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류처럼 찌르르 하고 스쳐 지났다. 처음 만났던 날 새벽에 본 그의 잘 단련된 몸매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나에게 일렀다. “믿고말고요.” 입속말로 덧붙였을 정도였다. 벗은 그의 몸이 신체나이 서른 살쯤 될 거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서른 살보다 더 싱싱한 젊은 육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얼굴만으로 볼 때 그의 나이가 예순이나 일흔을 훨씬 넘겼음직하다는 것도 그랬다. 눈가로부터 볼의 하관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꽉 차 있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 자신이 의식의 작용을 통해 서른 살의 몸, 일흔 살의 얼굴을 갖도록 스스로 조절해왔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