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들, 격식 좀 깰 수 없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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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02면

이명박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10대 그룹 회장들과 만난다. 이 자리에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과 일자리 창출 방안 등 경제 현안에 대해 논의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아울러 올해 정부가 목표로 하는 ‘5% 성장, 3% 물가 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재계의 협조를 당부할 것이라고 한다.

올해 세계 경기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유럽에서 스페인·포르투갈 등의 재정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과열 경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긴축을 추진 중이다. 유가·곡물 등 국제 원자재값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 하나같이 우리에겐 좋지 않은 소식이다. 이를 입증하듯 수출 증가율이 지난해 28%에서 올해 10% 선으로 둔화될 조짐이다. 물가 문제는 이미 ‘발등의 불’이 됐다. 여기에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전세난과 사상 최악의 구제역까지 겹쳐 많은 사람들이 시름하고 있다. 한마디로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 증시에서 연초부터 주가가 오르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시장에 풀린 돈이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해 증시로 몰린 덕분이다. 하지만 이것도 낙관하기 어렵다. 앞으로 경제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버블의 위험성이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재계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글로벌 금융위기를 딛고 가장 빠르게 회복한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만남이다. 하지만 이 모임이 성과를 거두려면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이 이뤄져야 한다. 혹여 대통령이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얘기하고, 대기업 회장들은 그 말을 받아쓰는 식이어선 안 된다. 그런 일회성 행사는 기업의 사기를 꺾고 창의력만 떨어뜨릴 뿐이다. 10대 그룹은 벌써부터 24일 모임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한다.

지난해 9월에도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들이 만난 적이 있다. 당시는 정부가 지방선거 패배 이후 공정사회와 친서민, 상생 등을 강조하면서 대기업을 압박하던 때였다. 분위기는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참석한 대기업 회장 12명은 5분씩 돌아가며 동반성장 방안을 보고했다. 대통령은 대기업의 우려를 의식한 듯 ‘강제가 아닌 자율적 상생’을 강조했지만 대기업 회장들은 “상생방안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불과 4개월 전이지만 그 자리에서 오갔던 얘기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이번에는 좀 달라져야 한다. 형식에 붙들리고 격식에 얽매인 자리라면 기대할 게 별로 없다. 이 대통령과 대기업 회장들이 진심을 담아 좀 더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기 바란다. 우리 청년들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 무엇을 준비해야 앞으로 5년 후, 10년 후에 먹고 살지, 양극화는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대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고, 중소기업은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 등등에 대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면 계급장을 떼어놓고 밤새워서라도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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