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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독립정신, 소월 詩心…이 땅에 근대의 씨 뿌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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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19면

옛 배재학당 동관에 눈이 내린다. 이 건물 안에서 근대교육이 싹텄다. 아담하지만 멋지고 당당한 건물에는 체험교실과 상설 전시실, 기획 전시실, 세미나실이 있다. 신동연 기자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나임을 아는 건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그것을 알면 곧 기적이 일어난다. 삶을 기적으로 바꾼 역사적 위인들은 하나같이 악조건 속에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고 연출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난 현장을 찾아다니며 감동하고 그를 닮고자 열망한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54> 서울 정동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덕수궁 돌담을 오른편에 끼고 걷다가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서소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배재공원은 아담하다. 공원을 지나면 고풍스러운 적벽돌 건물이 500년 넘은 향나무를 품고 서 있다. 배재학당 동관(東館),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주변에 훨씬 더 크고 높은 건물들이 많은데 작지만 당당한 풍모로 눈길을 끈다. 배재중·고는 1984년 강동으로 옮겼다.
왼편 거대한 회화나무 가지는 자유분방하다. 가지 끝에 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유로운 지성을 상징하는 학자수(學者樹)의 자태를 음미한다. 터줏대감처럼 터를 지키고 서 있는 아름드리 향나무와 회화나무는 이곳이 본디 독서인들이 대를 물려온 거주지였음을 말해준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으로 돌아 박물관 정면과 마주 선다. 좌우 세 개씩의 화강석 배흘림 기둥이 받치고 선 출입구를 중심으로 완전한 대칭구조다.

1886년 고종이 내려준 ‘배재학당’ 현판. 그 아래로 유길준이 친필 서명한 서유견문과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들이 전시돼 있다. 신동연 기자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안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교훈이다. 도포 입고 갓 쓰고서 하인까지 대동하고 학교에 다녔던 개화기 양반 자제들과 신분제 사회의 실상을 생각하면 공감이 간다. 배재학당의 설립자 아펜젤러(H.G. Appenzeller·1858∼1902)는 이 땅에 최초로 서양식 근대교육을 연 선교사다. 그는 교육의 출발점을 스스로 행하는 데서 찾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인 그는 동료가 포기한 ‘모기와 말라리아의 나라’ 한국에 온다. 그것도 학교를 마치고 결혼한 직후였다. 부부는 일본과 부산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가 되는 언더우드와 함께였다. 후크 미국 공사는 ‘지금 서울은 외국 여자가 살 만한 환경이 못 된다’며 아펜젤러 부부를 일본으로 돌려보낸다. 6월 20일 다시 제물포에 상륙한 부부는 7월 19일 서울에 입성해 정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전도보다 교육사업에 주력한다. 1885년 8월 3일, 집에서 영어학교를 열고 이겸라·고영필 이렇게 두 학생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날이 배재학당의 개교기념일이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 등 셀 수 없는 인물들이 배재학당에서 배웠다. 음악·체육 분야에서도 선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인교육과 동아리 중심의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지향하는 배재학당은 ‘배재인만의 유전자’로 통한다. 그들의 자부심은 입시교육 위주의 학교들과는 확연히 다른 데서 출발한다.

120여 년 전에 이미 영어로 진행된 수업은 생리학·화학·음악·미술·체육·연극 등에 걸쳐 다채로웠다. 학생들도 국제적이었다. 조선인과 미국인, 일본인이 함께 배웠던 것이다. 붓과 한지 대신 신기한 연필과 공책을 받아 든 학생들은 걸상에 앉아 석칠판에 분필로 필기하는 서양인 교사와 만났다. 음악 시간에는 피아노가 등장했다. 1897년부터는 교복을 입고 모자를 썼다. 모두가 처음 접하는 개벽의 순간들이었다.

학생회였던 협성회(協成會)에서는 1896년부터 과외활동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주제토론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서재필이 조직했다. 국문과 한문의 섞어 씀에 대해, 아내와 딸이 교육받는 것에 대해, 나라에 철도를 놓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했다. 이 협성회 활동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 민중계몽운동으로 발전한다.
‘2천만 동포 가운데 일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십 명이 다 죽어 없어진 후에라도 나 하나만은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그리하여 이 나라를 외국의 침략이 없는 자주독립국가로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웁시다!’ 당시 진보적인 청년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의 명연설로 일찌감치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서양식 근대교육이 행해졌던 1층 체험교실로 들어선다. 책걸상이 빼곡히 놓였다. 걸상에 앉아서 석칠판 앞 스크린에 흐르는 영상자료를 본다. 전인교육을 실시했던 아펜젤러의 교육철학이 선명하게 파고든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교실마다 스팀 난방이 작동했다고 한다.

교실을 나와 상설 전시실로 간다. 1886년 고종이 내려준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과 유길준이 서명한 서유견문,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들이 전시돼 있다. 교과서는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근로학생들의 작업으로 발간됐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 안에 일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글과 한문, 영어 이렇게 세 언어를 뜻하는 삼문(三文) 출판사는 교과서 외에도 독립신문과 협성회보도 인쇄했다. 협성회보는 훗날 국내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으로 발전한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배재를 거쳐 간 각 분야의 인물들과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1925년) 초판본을 볼 수 있다.

…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국민의 입에 붙은 이 유명한 구절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시 ‘하늘의 옷감’ 가운데 ‘그대 발 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구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당시의 교지 ‘배재’에는 학생들이 번역한 외국문학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 시절 배재학당에서는 세계 문학을 발 빠르게 수용하고 있었다. 김소월 연구의 권위자 하버드대 데이비드 매캔 교수는 두 차례나 박물관에 찾아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에 젖었다고 한다. 문화는 발신자와 수신자 상호간의 교섭에서 자연스럽게 모방하고 재창조되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2층 전시실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쳤다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다. 1864년 독일 블뤼트너사가 제작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다. 아펜젤러의 일기와 그의 가족들이 남긴 소품들도 정갈하게 전시돼 있다.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 일행을 구하려다가 순직했다.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이 땅에 바친 위대한 영혼의 소망은 2세에게로 이어졌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을 이끈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잠들어 있다.

졸업앨범으로 배재학당 125년 이야기를 전하는 방에서는 저마다 추억의 독립영화 한편을 찍게 된다. 학교생활을 통해 본 이 땅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개성적인 모습과 꿈을 담은 졸업앨범에서 식민지 학생들의 우울함 같은 건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첨성대에 벌떼처럼 엉겨 붙은 사진, 안경 낀 학생들만 모여서 찍은 ‘안경당(眼鏡黨)만세’ 사진, 교복 차림으로 서울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연출한 사진들은 기발하고 엉뚱하다. 사진의 배경에서 근대 경성의 풍경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시절은 암울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식민지를 넘어 희망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젊은 꿈들이 있어서일 게다. 어느 때고 힘겹지 않은 때가 있으랴.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낸 나이든 관람객들은 빛 바랜 흑백사진 앞에서 서성이며 세월의 더께에 가려있던 자아를 찾아내고, 견학 온 학생들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선배들의 학창시절을 대리 체험한다.

“게일 선교사의 한글번역으로 배재학당에서 출판한 천로역정 목판본과 목판들을 보세요.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가면서 기독교 사상과 서구 문화를 심어가려는 속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민화를 삽화로 썼고 등장인물들은 소망이·충직이·알뜰이·독실이·사랑이 등 정겨운 한국 이름들이지요. 아쉽게도 삽화가 담긴 목판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가치를 알아본 이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겠지요.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직접 건물을 보수하고 전시를 기획한 김종헌(49) 박물관장은 정동 일대에서 덕수궁을 제외하고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라고 소개한다.

배재학당은 구한말 전제군주체제 아래서 민주교육의 장을 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교육을, 그 이후에는 전인교육을 펼쳐왔다. 19세기 말 정동은 외교·정치·종교·교육·문화의 중심이었다. 배재학당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였다. 이 박물관 안에는 그 무렵 우리가 일찍이 누렸으나 안타깝게도 지켜내지 못한 전인교육의 한 전형이 담겨 있다. 종교적인 편견을 버리고 유심히 참관하다 보면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교육문제의 해법도 그 실마리를 찾을 듯싶다.

아펜젤러는 거룩한 교육자의 상징이다. 그는 이 언덕배기에서 어쩌면 평범한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었다. 어수선했던 구한말, 그는 이 땅에서 희망을 보았고 자신의 목숨을 씨앗으로 심었다. 박물관에서 그의 교육 철학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면 기적은 우리 앞에서 늘 현재진행형이다. 사회학자 짐멜은 객관적 전문지식과 문화의 학습, 인성교육의 병행을 근대교육의 미덕으로 꼽았다. 지금 우리 교육의 현주소는 어떤가. 대학입시 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문화도 인성교육도 실종돼버렸다. 교육만큼은 이상을 좇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게 현실적일지라도 교육만큼은 마지막까지 이상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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