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귀갓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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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10면

남자는 얼굴이 찡그려졌다. 며칠 전 빙판길에서 삐끗한 오른쪽 발목이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오전에 남자는 절룩거리는 발로 지사장 회의에 참석했다. 그것은 마치 청문회에 불려나간 증인 신세 같았다. 아예 휠체어를 타고 나올 걸 그랬어,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회의시간 내내 남자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오후에는 외부 미팅이 두 군데나 있었다. 날씨가 추웠다. 30년 만의 추위 속을 남자는 떨며 절며 외근을 다녀왔다. 얼굴은 찢어질 것 같았고 발목은 부러질 것 같았다. 남자는 여섯 시가 되자마자 퇴근하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남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약속이 남자의 아픈 발목을 붙잡는다. 자신이 주최한 자리고 이미 몇 번이나 연기했던 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약속이다. 남자는 술을 마신다. 집에 가야 하는데, 발목도 시큰거리는데 남자는 건배를 하고 소맥을 삼킨다.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고 약속에 못 나온 친구의 근황을 걱정하고 구제역 걸린 가축들의 살처분에 분개하고 재앙 수준인 날씨와 정치를 개탄한다. 남자는 금세 취한다. 창 밖에는 비듬 같은 눈발이 날린다. 하느님 며칠째 머리를 못 감으셨나? 남자는 쓸쓸한 농담을 던지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다.

자리가 끝나고 남자는 집에 가려고 한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근거다. 단칸방이든, 옥탑방이든, 반지하든 돌아갈 집이 있는 한 자신은 인간이라는 근거. 눈발은 점점 굵어진다. 거리와 하늘에는 눈이 붐빈다. 사람들이 남자를 붙잡는다. 딱 한잔만 더 하자고. 남자는 집에 가야 하는데, 발목은 퉁퉁 부었을 텐데. 남자는 절룩거리며 따라간다.

2차로 갔던 선술집에서 남자가 나올 때쯤 세상은 온통 눈에 파묻힌다. 남자를 붙잡던 사람들 손아귀에도 힘이 풀린다. 그래도 남자는 집으로 갈 수 없다. 정종을 몇 잔 마시는 사이 도로와 차들이 사라졌다. 버스는 이미 끊긴 시간.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택시는 다 어디로 갔을까? 폭설이 다 살처분한 것일까? 간혹 보이는 택시에는 누군가 이미 타 있고, 빈 택시는 호출 받아 가는 중이라고 승차를 거부한다. 남자는 택시를, 폭설을, 약속을, 아픈 발목을 욕한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라는 파울루 코엘류의 말은 수정돼야 한다. 남자가 간절히 원할 때 처음엔 약속이, 다음엔 2차가, 폭설이 그리하여 온 우주가 가로막는다.

겨우 남자는 택시를 잡아탄다. 중간에 사고가 날 뻔 한다. 죽음은 삶과 얼마나 가까운가? 남자는 자신의 오른쪽 뺨을 살짝 슬로모션으로 비껴가는 죽음을 본다.

드디어 남자는 집에 도착한다. 집은 어둡다. 아내도 아이들도 없다. 그제야 남자는 깨닫는다. 아내는 워크숍 갔고 첫째는 군대에, 둘째는 친구 집에 가 오늘 집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가족이 없으면 집은 그저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남자는 털썩 소파에 앉는다. 발목은 퉁퉁 부어있다. 따뜻한 물에 담그면 좀 나을까? 남자는 몸을 씻고 나와 시계를 본다.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있다.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대신 통증 같은 잡념만 온다. 남자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난 듯 몸을 일으킨다.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선다.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와『대한민국 유부남헌장』『남편생태보고서』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일하고 있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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