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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막은 어머니의 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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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

“명박은 가출을 결심했다.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리어카 과일장사로 사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달펐다. 어머니에겐 서울로 유학 보낸 큰아들이 제일이었다. 자식들을 위한 새벽기도의 시작도 큰아들이었다. 명박은 이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새벽기도만 끝나면 가출하리라고 결심한 그날 아침! 맏아들로 점철됐던 어머니의 기도문이 바뀌어 있었다. ‘명박이는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참고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잘 해주지 못해도 불평이 없는 명박입니다….’ 명박은 가출을 단념했다.”(홍은희 『훌륭한 어머니들』 중에서)

 17일 방송·통신인 신년하례회에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 이명박 대통령은 말없이 악수만 했다. “오랜만이다”는 인사도 없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는 그렇게 서먹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정동기 전 감사원장 후보자를 안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반대해 사퇴시킨 뒤의 일이다. 서운한 청와대는 “한 사람이 밉다”며 안 대표를 반공개 지목할 정도다.

 언론에선 웬만큼 자신이 없으면 ‘숙명’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서슴없이 숙명이란 용어를 쓰는 게 임기 말 대통령과 집권당 간의 갈등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우리는 네 명의 대통령을 겪었고, 다섯 번째 대통령을 겪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앞서간 네 명의 대통령은 모두 임기 마지막 해에 탈당이란 형식으로 여당과 멀어졌다. 자의냐 타의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임기 말이 되면 집권당이 대통령을 떠나거나 버리고 가출한다는 점이다.

 바라보는 시선의 다름이 빚어내는 공식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정치가는 ‘끊임없이 천사적 대의(天使的 代議)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 대통령에게 천사적 대의는 2007년 12월 19일 그에게 표를 던진 1149만2389명(48.7%)의 국민이다. 임기 5년 동안 대통령은 이들이 맡긴 대의를 기억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한다.

 하지만 여당에 이 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일 뿐이다. 더 이상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표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2012년 12월 19일이라는 새로운 표에 꽂힌다. 대통령이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주어진 ‘소명’에 매달리는 데 반해, 여당은 ‘현실의 이익’에 더 목말라하는 이유다. 그래서 임기 말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구나 여소야대였다. 대통령이 점점 외로움을 타고, 세상 인심의 험악함에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도 이때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공연하는 드라마가 비극으로 흐를 소지가 큰 건 또 있다.

 집권 4년, 5년차를 맞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전문가 반열에 오른다. 취임한 이래 청와대 참모나 부처의 장관들은 두세 차례, 심한 경우 서너 차례 바뀌었지만 대통령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년 전 임명됐거나 새로 임명되는 장관, 수석들은 대통령이 들이미는 “그거 작년에는 이랬어요” “이봐요, 아직 업무 파악이 안 돼서 잘 모르는가 본데”라는 경륜의 두께 앞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2007년 1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지막 신년 특별연설문은 A4용지 61쪽, 4만3000자가 넘었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 연설 중간 노 전 대통령은 배석한 경제부처 장관들을 둘러보며 “여기 경제관료 수십 년 하신 분들도 있지만, 저보다 경제 모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는데도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함,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은 점점 대통령을 고립시킨다. 그 고립 속에서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 말 국정 관리의 실패라는 도돌이표를 그렸다.

 2011년 1월 이 대통령의 궤도도 그 초입에 서 있다. 안상수 대표의 ‘거사(擧事)’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위기 앞에서 집권당의 가출을 막고, 소명도 마쳐야 할 사람은 다름아닌 대통령이다. ‘일’을 좋아하는 이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일은 집권당이란 울타리, 국회라는 울타리 없이는 불가능하다. 장관 임명이 그렇고, 법안 통과가 그렇고, 예산안 처리가 그렇다. 그래서 ‘소명의 정치’를 하려면 임기 말 대통령의 레퍼토리는 바뀌어야 한다. 내 사람들로만 둘러쳐진 편안하고 푸근한 울타리 대신 소외됐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바른 말 했던 사람들로 울타리를 넓혀야 한다. 그 옛날 대통령 어머니의 바뀐 기도가 가출을 막은 것처럼.

박승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