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이례적으로 WSJ 기고 … 기업 위해 “규제와 전쟁” 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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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 설탕 대신 단맛을 내는 데 쓰는 사카린. 이를 두고 미국 규제당국 두 곳은 서로 다른 지침을 적용해왔다. 식품의약국(FDA)은 사카린이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판정했다. 이와 달리 환경보호청(EPA)은 오랫동안 사카린을 인체에 해로운 화학물질로 분류해왔다. 두 기관의 엇갈린 기준은 지난해 12월에 와서야 EPA가 기준을 바꿈으로써 통일됐다.

 # 미국 자동차업계는 복잡한 연비절감 기준 때문에 오랫동안 헷갈렸다. 의회와 연방 및 주 정부의 규제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미 교통부와 EPA는 자동차회사와 노조는 물론 캘리포니아 주정부 및 환경보호단체와 머리를 맞댄 끝에 새 기준을 만들었다. 자동차회사로선 기준이 엄격해졌지만 불확실성이 없어졌다. 소비자는 연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국가적으론 연간 18억 배럴(2860억L)의 연료를 절감했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이 사례로 든 규제 개혁 성과다. 그는 1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게재한 특별기고를 통해 이 같은 예를 들면서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기고에서 그는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 경쟁력을 가로막거나 낡고 중복되는 정부 규제를 없애겠다”며 “이를 위해 정부 규제 전면 재검토를 골자로 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의 이 같은 행보에 미 재계는 환영하고 나섰다. 대표적 보수지인 WSJ에 규제 개혁 방침을 밝힌 것부터가 친기업 행보를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바마의 기고는 마치 2008년 1월 이명박 당선인의 ‘전봇대 뽑기’를 연상시킨다. 목포 대불산업단지의 전봇대는 이명박 정부의 규제 철폐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집권 후 이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금융위기를 수습하면서 그는 월가에 재갈을 물리는 데 앞장섰다. 월가 은행이 자기자본으로 위험한 파생상품에 투자할 수 없도록 옥죄는 ‘볼커 룰’을 만든 것도 오바마다. 전국민 건강보험시대를 모토로 한 그의 건강보험 개혁은 보험료 부담 증가를 우려한 재계의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야당인 공화당은 오바마가 정부 덩치만 키우며 사사건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려 한다며 공격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2일 중간선거 패배 이후 오바마는 국정운영의 방향을 확 바꿨다. 진보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공화당이 요구해온 ‘부자 감세 연장안’을 수용했다. 이어 재계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도 한껏 몸을 낮췄다. 연초엔 백악관을 장악해온 개혁파 측근을 친기업 인사로 교체했다. 민주당 일각의 반대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이런 변신을 이끌어낸 건 오바마를 짓누르고 있는 일자리 압박이다. 이날 WSJ 기고문에도 ‘일자리’와 ‘성장’이란 말이 각각 세 번씩 등장한다. 두 자릿수에 육박하고 있는 실업률은 내년 재선 가도에 최대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취임 직후처럼 재정을 쏟아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나랏빚이 위험 수준까지 늘어난 데다 재정적자에 민감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탓이다. 결국 오바마로선 돈을 갖고 있는 기업을 설득할 수밖에 없다. 현재 미국 기업들은 2조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깔고 앉아 있다. 결국 이날 기고는 기업을 향해 규제를 과감히 풀겠으니 투자와 일자리 늘리기에 나서 달라는 호소다. 일종의 재계를 향한 ‘햇볕정책’인 셈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오바마의 규제 개혁에 회의적 시각도 나온다. 우선 이번 규제 개혁 대상엔 정부기관만 포함시켰다. 금융·건강보험 개혁을 통해 새로 생긴 독립 규제기관은 개혁 대상에서 빠졌다. 규제를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뉴욕 타임스(NYT)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시절 자동차 에어백 규제 도입 예를 들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애초 자동차업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에어백 의무화 규제를 없애려 했다. 그러자 손해보험업계가 들고 일어나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결국 에어백 의무화 조치가 도입됐다. 오바마가 성공 사례로 든 연비절감 기준 통일도 미국 3대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정부 구제금융을 받아 국영기업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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