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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선조의 피란길 … 민중은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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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선조가 1593년 9월 의주에 머물 때 내린 한글 교서. 당시 조선 백성 가운데 포로로 잡혀 일본군에 협조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개과천선을 촉구하면서 돌아오라고 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1592년 4월 29일 저녁, 신립(申砬) 장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 도성은 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제 충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에는 일본군을 막아낼 아무런 방어막이 없었다. 대궐을 지키는 군사들은 달아나고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도 작동하지 않았다.

 30일 새벽, 선조(1552∼1608)는 궁궐을 나서 북으로 향했다. 호위병이 100명도 되지 않는 초라한 행렬이었다. 일부 장수들은 달아나면서 “이 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것이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도망치는 병사들 중에는 “임금(일본군을 비유한 말)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났구나.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라고 떠드는 자도 있었다. 민심도 돌아서고 있었다.

 선조 일행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종일 걸었다. 저녁 7시쯤 파주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했다. 파주목사 허진(許晋)이 선조를 위해 식사를 준비해 기다렸다. 하지만 시장한 사람은 선조만이 아니었다. 호위병들이 부엌으로 달려들어 준비한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웠다. 선조에게 바칠 음식이 없어지자 허진은 처벌받을까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린다.

 5월 2일, 개성에서 한숨을 돌린 선조는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사람들은 왕자들 집안에서 사사로이 산림과 갈대밭을 차지하고 백성들이 이용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호소했다. 선조가 처음으로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었다.

 5월 14일, 평양에서는 이현(李俔)이 작심하고 선조에게 쓴소리를 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여러 왕자와 외척 집안의 침탈 행위, 외교 실책, 공평하지 못한 상과 벌, 막혀버린 언로, 가혹한 부세 징수’ 등을 선조의 실책으로 거론했다. 그러면서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仁嬪)의 오라비 김공량(金公亮)의 목을 쳐야 한다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왕실 측근들을 단속하지 못한 것이 민심이 떠나게 된 원인이라는 진단이었다.

 6월 22일, 선조는 의주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숙천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 관아 담벼락에 ‘국왕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간다’고 낙서를 했던 것이다. 선조의 행방을 일본군에 알려주기 위해 고의로 그런 것이었다.

 파천하는 50여 일 동안 선조는 민심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바로 그때 남방에서는 이순신과 의병들의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이순신과 의병들을 대하는 선조의 속내가 복잡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