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2) 아이젠하워의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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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앞줄 오른쪽에서 둘째)이 펜을 들어 승리의 ‘브이(V)’자를 만들며 웃고 있다. 왼쪽에서 셋째가 당시 참모장인 월터 스미스다. 53년 5월 백선엽 장군을 면담한 스미스는 CIA 국장 출신으로 정보·외교통이며 국무부에서 전후의 국제관계를 조율한 인물이다. 라이프지 작품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백 장군, 나는 원칙적(in principle)으로 그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행정부에서 추진하는 것과는 별도로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합니다”고 말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원칙적 동의” #마침내 아이크 입에서 떨어진 말 #백악관 오벌룸의 기적이 … #내친김에 경제 원조까지 요청했다

 나는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동숭동의 미 8군 사령부에서 한국군 증강계획에 관해 브리핑한 일이 있다. 앞에서도 소개했던 내용 그대로다. 그때도 아이젠하워는 내 브리핑을 들은 뒤 “원칙적으로(in principle) 동의한다”는 말을 했다.

 내가 워싱턴의 백악관 오벌 룸에서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을 언급했을 때도 그는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이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미 대통령이 한국 당국자에게는 처음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말은 결코 쉽게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 조약은 이승만 대통령이 여러 차례에 걸쳐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에 전혀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무시하거나, “지금 상황에서 한국과 그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식의 냉정한 답변만을 했던 상태였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하면 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준 답변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진입하는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미 대통령의 발언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미국이 내가 방미했던 시점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의 방위조약을 왜 전향적으로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잘 모른다. 무슨 계기가 있었을 법하지만, 당시 미국 행정부의 속사정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에 대해서는 그런 정도로 언급했다. 그 다음에도 할 말이 있었다. 내친김에 할 말은 다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미군에게 5만분의 1 지도를 요구하고, 155㎜ 야포와 성능 뛰어난 전차를 요구하던 버릇은 그때 백악관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경제원조도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막 건국하고 난 뒤에 대한민국은 격렬한 전쟁을 치러 형편이 아주 어렵습니다. 휴전 뒤에 나름대로 국방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를 받쳐줄 경제개발도 필요합니다.” 내가 꺼낸 말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미 우리는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논의 중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백 장군, 언제까지 워싱턴에 머무르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3~4일 더 체류할 예정입니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여전히 친근한 표정이었다. 상호방위조약 문제를 언급할 때 다소 굳었던 그의 표정은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한 밝은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우선 월터 스미스 국무차관에게 연락을 해놓을 테니 그 사람을 만나도록 하십시오. 세부적인 것은 그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마친 뒤 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젠하워는 그러다가 무슨 메모 쪽지를 받더니 “스미스 차관에게는 내일 오전 10시에 가보라”고 했다.

 스미스 국무차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젠하워 당시 총사령관의 참모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런 신임을 바탕으로 늘 곁에 두고 있던 인물이어서, “그를 찾아가 만나보라”는 대통령의 언급은 반갑기 짝이 없었다. 대통령이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을 두고 무엇인가 결단(決斷)을 내린 상태이고, 그를 국무부와도 상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면담을 마친 뒤 호텔로 와서 알레이 버크 제독에게 연락을 했다. “내일 국무부로 스미스 차관을 만나러 갈 예정이니 함께 가자”고 했다. 버크 제독은 “좋다. 내일 아침 호텔로 찾아가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덜레스 장관이 이끄는 미국의 국무부는 한국 상황 전반에 관해 국방부와 다른 시각을 보이는 일이 많았다. 상호방위조약에 관해서도 국방부는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국무부는 더 냉정하게 저울질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국무부를 이튿날 아침 10시에 찾아갔다. 버크 제독은 약속대로 호텔에 와서 나와 함께 동행했다. 국무부 차관실에 들어서는데, 스미스 차관은 나와 동행한 버크 제독을 보더니 “아니, 자네는 왜 왔나”라고 물었다. 나는 얼른 나서서 “버크 제독은 한국 동해안에서 나를 늘 지원해줬던 함대 지휘관이었다. 더구나 휴전회담 대표를 함께했던 전우여서 내가 요청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미스 차관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나는 그의 사무실에 앉아 전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눴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스미스는 내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만 있었다. 나는 휴전 뒤 한국이 맞을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했다. 경제지원과 함께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버크 제독은 역시 오랜 전우답게 나를 옆에서 지원했다. 스미스 차관은 다소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표정 없이 내 이야기와 버크 제독의 말을 한참 듣더니 그는 “당신이 말하는 뜻을 잘 알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가 물었던 것은 없었다. 약 20분 동안 이어진 면담에서 주로 내가 이야기를 했고, 버크가 나를 지원하면서 추임새를 넣는 식이었다. 국무부 면담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내가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을 만나 상호방위조약을 언급하고, 이어 그 후속으로 스미스 국무부 차관을 만난 일이 어떤 효과를 낼 것인가. 그것은 어떤 메아리로 돌아올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방미 일정은 다시 이어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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