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미·중 정상회담 지켜보는 한국인의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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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미·중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공연히 불안하다. 당사자였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열강의 정상들이 한반도 운명을 마음대로 요리했던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나 얄타 밀약과 같은 제국주의 시대의 악몽은 지금도 국제정치의 큰 고비마다 막연한 불안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고 우리 스스로의 위상도 많이 달라졌다.

 나라의 지리적 위치는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지정학적 이론은 오랫동안 정설로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공간적 개념인 지리적 위치는 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시간적 차원에서 본 인류사회는 부단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과 시장의 획기적 발전은 지정학적 상수(常數)보다는 문화적·경제적 변수가 역사 진전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로 세계화된 지구촌시대의 이웃은 이미 전통적인 지리적 구역만으로 한정 지을 수는 없게 되었다.

 반세기에 걸친 유럽공동체의 지속적 팽창과 성장은 국제사회에서 전통적인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이웃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했다. 그런 가운데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라는 견해도 큰 무리 없이 널리 국제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으며 미국과 더불어 새로운 G2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판단도 널리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G2 시대가 온다는 것은 우리 한국인에겐 역사의 순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국경을 맞대고 수천 년을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과, 20세기 어려운 세계사의 고비에서 우리에게 결정적 도움을 줬던 미국이란 두 나라가 초강대국이란 사실에 대해 한국인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오직 바람이 있다면 미·중 G2 관계가 ‘2차 냉전’이나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융합’으로 아시아와 지구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기초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며칠 전 브레진스키 교수가 지적했듯이 중국의 장기 목표와 전략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불신과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지만 상호의존의 필요성이 한층 완연해진 오늘의 지구촌에서 두 나라는 역사가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동반자관계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천명해야 할 것이다.

 20세기를 미국과 유럽의 동반자관계가 주도했다면 21세기엔 미국과 아시아의 동반자관계가, 특히 미국과 중국의 협조관계가 핵심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는 대서양과 태평양이란 두 날개가 있어야 계속 비상할 수 있음을 미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은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한편 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북아에서 한·중·일 3국 간의 특수한 동반자관계를 활성화하는 데 소극적이란 인상을 과감히 불식시켜야 한다.

 사실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전통과 경제적 자산은 아시아 지역공동체 발전에 핵심적 기초가 될 수밖에 없다. 한자(漢字)를 매체로 한 유교문화의 전통과 디지털시대의 창의성을 공유하고 있는 동북아는 새로운 지구촌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고지에 서 있다. 다만 19세기 서구제국주의의 팽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중·일은 각각 다른 궤도를 지나오면서 각기 주체성을 지키고 서양문물과 제도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며 국가발전의 돌파구를 모색했던 지난 역사의 공통점을 이해해야만이 동북아지역공동체 건설은 순조로울 것이다. 특히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주도했던 미국이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및 한국과 각각 특수한 유대관계를 발전시킨 경위와 결과도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한·중·일 삼국 간의 경제 및 문화적 융합이 진전될 때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반자관계도 적절한 궤도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전망을 쉽게 허용할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북한의 존재와 그 체제가 지닌 특수한 성격이다. 한마디로 북한의 문제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역주행하는 예외성이며 대형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요소다. 미국과 중국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지역의 G2 초강대국으로서 그 대형사고를 예방해야만 하는 책임을 모면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 아시아의, 그리고 지구촌의 평화와 발전으로 향한 첫걸음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가 협조와 융합을 도모하는 세계사에 역행하는 예외지대로 계속 남지 않도록 강력한 리더십을 함께 행사하기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중의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불안한 마음 가운데서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기대인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