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4-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왜, 뭐가 잘못되었어? 내 말이 영 맘에 안 드는 딴 겨레 방송이야?”

 혜련이 한참이나 대꾸 없이 나를 건너보는 눈길이 하도 깊고 어두워 나는 되도록 가벼운 어투로 그렇게 물었다. 실제로 나는 무엇이든 그녀가 잘못됐다고 하면 얼마든지 내가 한 말을 취소하고 사과할 용의가 있었다. 그제야 무언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깨어나며 말했다.

 “잘못된 게 아니라 너무 귀에 설어서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음악한다, 아니, 연극한다…. 고백하자면, 여기 온 지 삼 년이 넘도록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내가 유학 왔다는 느낌은 더욱….”

 그러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쓸쓸하게 들렸다. 나도 까닭 모를 비감에 끌려드는 게 싫어 나는 말투를 더욱 가볍게 했다.

 “그럼 뭐야? 남 다하는 이혼 한 번 했다고 한국과는 아주 사요나라였어?”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가볍게 받아주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는 게 아니라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느낌, 결별이나 이탈의 결의보다는 회귀의 본능 같은 것에 내몰린 그런 출발이었어요. 마침 엄마 아빠가 다 여기 와 계셨던 것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유학도 그래요. 나는 벌써 이 년이 넘도록 여기 연극판을 기웃거리고, 옛날 함께 음악을 배운 동창들과 어울렸지만, 유학을 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보다는 이제 제대로 된 본바닥에서 인턴수업이나 실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지요. 이러다가 길이 생기면 슬며시 이곳 연극판에 끼어들 길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물론 갈수록 가망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무슨 쓸쓸한 고백이나 하듯 그렇게 말했다. 거기까지 듣자 나도 더는 농담조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거 남의 일이라고 내가 너무 마구잡이로 넘겨짚기를 했나? 미안해. 너도 고통 받고 슬퍼하는 인간이라는 걸, 그것도 상처받기 쉬운 젊은 여자라는 걸 잊어버려서. 내가 함부로 말한 게 있더라도 너무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

 정색을 하고 그런 말로 후퇴하는데 오히려 그녀가 담담해진 얼굴로 받았다.

 “너무 미안해할 것은 없어요. 내게는 익숙한 선생님의 방식이니까. 그저 선생님이 제게 이렇게 물은 걸로 알아들을게요. 나하고 여기서 브로드웨이 연극 제대로 공부해볼 생각 없냐? 그리고 마음 풀리는 대로 한국에 돌아가 다시 연극해볼 생각은 없냐….”

 “그렇게 이해해 주면 고맙고. 실은 이놈의 거리극장 유학도 곧 쉽지는 않아. 들을 귀가 뚫리지 않아 반드시 남의 귀를 빌려가야 하는데, 그 귀 노릇 하는 녀석들이 은근히 지겨워하는 눈치야. 특히 뮤지컬은 과제 주듯 미리 대본을 구해 주어도 통역하고 해설하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끊임없이 객석에서 내게 숙덕거려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가 봐. 음악까지 들어 주어야 할 때는 더욱 그렇고…. 한국으로 돌아가 연극 다시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지.”

 내가 재빨리 그렇게 받자 그녀가 힘없는 웃음과 함께 화제를 바꾸었다.

 “알았어요. 선생님 말마따나 그놈의 연극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삼 년 만에 만난 근친 간의 얘기나 해요. 상간의 추억은 없지만, 헤아려 보니 우리도 꽤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요? 벌써 이십 년, 내 삶으로 보면 선생님을 알고 산 시간이 모르고 지낸 시간보다 배나 긴…. 우리 이렇게 하면 어때요?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 아는 사람들 가운데, 선생님이나 나 둘 중에 하나만 그 근황을 아는 사람들 얘기부터 시작해요. 그러면서 내가 떠나와서 잘 모르는 선생님의 최근 삼 년이나, 미국으로 건너온 뒤의 내 얘기도 여기서 한번쯤 털고 가는 것도 괜찮구요….”

 그래서 얘기는 자연스럽게 혜련이 이끄는 대로 흘러갔고, 헤어질 때까지는 제법 유쾌한 술꾼들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그 거리로 보아서는 위험시간대인 열한 시를 넘겨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나는 펍에서 불러준 택시에 올라 동남아인 운전수에게 내 숙소의 주소를 일러준 것으로 필름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전날 밤 마신 술 탓에 좀 늦게 일어났다. 그때만 해도 검고 시끌시끌하던 브루클린의 소음 때문에 그나마 마신 양에 비해서는 일찍 깨어난 셈인데,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떠올린 것은 내가 혜련을 만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억은 헤어지기 전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던 혜련이었고, 이어 옐로 캡과 동남아인 기사로 기억이 끝나자 나는 갑자기 후끈 달아 그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혜련을 다시 만나게 해줄 그 쪽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발치에 함부로 벗어놓은 겉옷 주머니들을 뒤져 보았다. 불길한 예감대로 그 쪽지는 보이지 않고, 난데없이 그 쪽지를 어디선가 내가 아무렇게나 날려버린 기억이 불쑥 솟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결코 그랬을 리 없는 기억이었다. 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가 한 행동들로 미루어 내 무의식 아래 묻힌 기억은 그녀를 꼭 다시 만나리라는 다짐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샤워부터 하고 쓰린 속에다 진한 커피를 쏟아부은 후에야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연락처를 알 것 같은 사람들이 넷이나 떠올랐다. 나는 전화통에 붙어 앉아 그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날이 휴일이라 그랬는지, 넷 가운데 셋이나 전화를 받았는데도 그녀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셋 중에 둘은 그녀가 뉴욕에 있다는 것조차 내게서 처음 듣는 눈치였다.

 그래도 나는 그로부터 사흘, 뉴욕 인근에 살면서 혜련을 알 만한 친구들에게는 모두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나중에는 한국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녀의 연락처를 알 만한 사람에게는 다 물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녀를 만났던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 근처를 어정거리면서 요행을 기다리는 한편 한 가닥 마지막 기대에 매달렸다. 나도 혜련에게 연락처를 적어 주었고, 그녀도 나를 다시 보아야 할 일이 생겨 그녀 쪽에서 내게 연락해 오는 것이 그랬다.

 돌이켜 보면 그날 혜련을 만난 것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연이었는데도,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맹렬하게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바랐는지는 영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나는 후끈 단 것 이상의 맹렬한 감정으로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빌며 보름을 보냈다. 그러나 끝내 그녀의 자취를 찾지 못해 혹시 내가 그날 술에 취해 헛것이라도 본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됐을 무렵 갑자기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어, 오늘 수업은 몇 가(街)에 있는 학교죠?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뵐 수 있을까요?”

 전화를 받으니 혜련이 늘 그러듯 어제 그제 별일 없이 헤어진 사람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파손되기 쉬운 물건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되도록 덤덤한 어조로 받았다.

 “오늘은 정해진 수업이 없어. 둘이 만나서 특별과외를 하도록 하지 뭐. 어디서 몇 시쯤이면 좋겠어?”

 그 보름 동안의 내 황망과 열중은 속 깊숙이 감춘 채였다. 내가 그렇게 애타게 찾아다닌 줄 알면 그녀가 정말 다시는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꼭꼭 숨어버릴까 봐, 또는 그녀의 연락처가 적힌 그 중요한 쪽지를 함부로 잃어버린 내 부주의와 무성의가 들킬까 봐. 그녀가 아는지 모르는지 매디슨 스퀘어 부근의 반스앤노블 옆 카페 하나를 일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또 네가 다시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줄 알았지. 요새 뭐 바쁜 일 있어?”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서도 나는 그동안의 내 집착이나 안달을 전혀 내색 않고 먼저 그렇게 물을 수 있었다. 보름 전보다 조금 수척한 얼굴로 나타난 그녀가 전화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목소리로 받았다.

 “조금요. 하지만 정 만나고 싶었으면 선생님이 전화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건 좀. 내가 제안을 한 사람이라 너무 졸라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나는 멀쩡한 얼굴로 보름 전 우리가 취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 제안으로 간주해준 화제 뒤로 숨었다. 그녀도 그걸 잊지 않고 있었던지 바로 받았다.

 “독촉 받지 않아도 그 제안에 꽤나 시달렸어요. 좋아요. 어쨌든 함께 길거리 대학에서 유학 시작해 봐요.”

 나는 속으로 펄쩍 뛰듯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시치미를 떼었다.

 “내가 이거 너무 억지를 부린 거 아냐? 나름대로는 가만히 인턴수업 잘하고 있는 사람을 쑤석거려….”

 “뭐, 그리 잘하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아요. 실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선 기분으로 이 거리 바닥을 헤매는 기분에 슬슬 지겨워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오신 건지도 몰라요.”

 그녀가 다시 그렇게 받아 그동안 내가 겪은 감정적인 갈등이나 혼란은 단숨에 씻겨나가고 우리는 보름 전 지나가며 주고받은 듯한 화제로 스스럼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자주 네 인생에 불쑥불쑥 나타나 이 일 저 일에 끌어들이는 거 아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아뇨. 선생님을 만날 때까지 한번도 그런 일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결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선생님께서 처음 그 말씀을 하셨을 때 벌써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은 못 했지, 라는 충격적인 깨달음 같은 것도 있었어요. 진작부터 누가 그걸 권해 주기를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그렇게 하여 혜련은 이번에는 내 엉뚱한 유학 동기가 되어 삶의 한 굽이를 다시 함께 걷게 되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