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이창호에게 바둑은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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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어떤 이는 축구를 하고, 어떤 이는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이는 바둑을 둔다. 이창호 9단에게 바둑은 무엇일까. 본인에게 물으면 싱긋 웃으며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한다. 사실은 물어볼 것도 없다. 이창호는 마법의 거울에 빨려들 듯이 어려서부터 바둑 외길을 걸은 것이고 그 같은 자신의 행보에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은 채 361로 바둑판에 몰두했다. 바둑사상 누구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창호 전성기에 서봉수 9단은 “이창호의 유일한 적은 이창호”라고 말했다. 사랑이나 결혼 같은 외적 요인으로 스스로 인생관이 바뀌거나 승부와 멀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이창호를 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러 이창호가 국수전 도전기를 두고 있다.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 9단이 ‘조 국수’로 불리듯 ‘이 국수’라 불리는데 그 이 국수가 이번 도전기에서 패하면 ‘무관(無冠’)으로 돌아간다. 1989년 14세 때 첫 타이틀을 따낸 이후 21년 만에 처음 무관이 된다. 상대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최철한 9단. 이창호가 조금 힘이 빠지던 2004년 무렵, 10년 후배 최철한은 이창호를 꺾으며 첫 우승을 거뒀고 자신의 최고 이력인 응씨배 우승도 이창호를 상대로 거뒀다. 상대 전적은 26승25패로 이창호가 조금 앞서지만 7번의 타이틀 매치에선 최철한이 5승2패로 크게 앞서 있다.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 이창호 바둑이라면, 뼈저린 강수를 연발하며 동아줄 같은 억센 힘으로 상대를 얽어버리는 것이 최철한 바둑이다. 최철한은 이창호의 천적으로 떠올랐다.

 12일 벌어진 국수전 도전기 첫판도 처음엔 최철한의 동아줄이 이창호의 대마를 감아버린 듯 보였다. 이창호라는 신화적인 존재가 드디어 무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창호는 바둑을 즐기듯 패를 이용해 변화를 일으키더니 136수 만에 역전 불계승을 거뒀다. 국수전은 5번기니까 아직 먼 승부지만 첫판을 보니 이창호가 쉽게 무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창호는 결혼한 지 석 달째. 얼마 전 집들이도 했다. 결혼 후 귀밑까지 올라간 커다란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승부는 외로움과 궁합이 맞는 직업이고 이창호는 고요함과 정적인 힘으로 세상을 지배했다. 부동심의 이창호, 수도승 같던 이창호가 이제 결혼을 통해 세속으로 내려와 시끌벅적한 일상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창호를 만나면 다시 바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야겠다.

박치문 전문기자 d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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