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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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20

나는 동쪽 숲으로 돌아서 경비실 쪽으로 다가갔다.
이상하고 이상한 슬픔은 여전히 다 가시지 않고 있었다. 프로그래머와 여린은 백주사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모들과 삼촌들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나자 명안진사는 잠깐 텅 비었다. 사람의 자취가 떠난 지 오랜 산사 같은 적막이 찾아왔다. 경비실 문은 닫혀 있었고, 노과장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장 경비실로 들어갈까 하다가 아직 정해진 점심시간도 끝나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슬픔이 남아 경비실 앞을 지나쳐 짓다 만 문화궁 쪽으로 걸어갔다. 문화궁 삼층에 오르면 도시의 서쪽을 싸고도는 강까지 내다보여 참 좋았다. 아무도 몰래 나만이 드나들어온 은밀한 공간이었다. 경비실에서 채 오십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막 문화궁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어이, 아저씨!”
돌아보니 경비실을 나온 노과장이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나의 슬픔을 들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대답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정해진 점심시간은 아직도 십여 분 이상 남아 있었다. “아저씨이, 거기 뭐하려 가요!”라고 노과장이 외친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문화궁 안으로 들어갔다. 시멘트 골조만 올라간 건물이었다. 거푸집을 했던 각목들과 철근더미와 시멘트 포대 등이 난삽하게 쌓여 있었다. 내가 대답도 안 하고 안으로 들어갔으니 노과장은 기분이 몹시 상했을 터였다. 쌓인 각목들을 피해 밟고 막 삼층까지 올라갔을 때 노과장이 씨근벌떡 따라 들어왔다.
“뭐야, 당신!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노과장이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나는 층계참에 앉아서 그냥 멀거니 노과장을 내려다보았다. 무시당했다고 느낀 노과장은 급격히 달아올랐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각목더미를 먼저 발로 찼다. 각목들이 함부로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나의 소망은 슬픔이 나의 내부에서 침몰하는 걸 느끼고 보는 짧은 시간의 고요함뿐이었다. 그것이 과한 소망인가. 노과장은 그러나 삼층 층계참까지 소란스럽게 쫓아 올라와 “씨팔…….” 하면서 와락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짜증이 났다. 멱살을 잡은 노과장의 손목을 충동적으로 내려쳤는지, 가슴팍을 밀어 젖뜨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노과장은 어엇, 하는 표정으로 두어 번 허공을 휘젓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의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윽고 슬픔이 썰물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나는 가라앉는 슬픔의 몸뚱어리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부처가 된 이사장은 묻기를 “아난다야, 물질은 그 자체의 알음알이가 아니므로 둘로 갈라설 것이니, 어떻게 중간이 있겠느냐?” 했고, 아난다가 된 이사장은 또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생각하는 자체가 곧 심성일 것이오매, 합(合)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있는 것이옵고…….” 이치는 모르지만 슬픔이 가라앉는 짧은 순간은 무언가를 ‘합하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나는 고요해졌으며, 고요해진 다음 가만히 일어나 층계를 내려왔다. 벽돌에, 모서리에 부딪쳐 머리는 깨지고 솟은 철근에 의해 가슴이 꿰어진 노과장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라도 감겨줄까 하다가 그대로 두고 문화궁을 나왔다.

햇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잠시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운악산 정수리가 쏟아질 듯 앞으로 달려들었다. 검은 새 몇 마리가 운악산 정수리를 향해 힘차게 날고 있었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고 하늘은 애오라지 맑고 푸르렀다. “속된 말로 하자면 육체란 의식의 똘마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불현듯 이사장의 말이 들렸다. 운악산 정수리의 ‘똘마니’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명안진사 전경은 여전히 정갈하게 비어 있었다. 애기보살이 춤추던 일이며 여린이 차에서 내려서던 일까지, 좀 전에 겪은 모든 것이 다 전생의 일인 듯 아스라했다. 경비실 안의 석유난로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을 줄였다. 어디선가, 풀루트 선율이 들리는 것 같았다. ‘클레멘타인’이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라고, 플루트 선율을 따라 비몽사몽 입술을 달싹달싹했다. 식곤증 때문인지 눈이 까무룩해졌다.
나는 석유난로 앞의 나무의자에 앉아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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