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 (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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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대마도에 세워진 박제상 순국비의 모습. 1596년 황신은 모든 신하들이 회피하려 했던 통신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2의 박제상’이 되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품고 명나라 책봉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596년(선조 29) 명과 일본은 임진전쟁을 끝내려고 4년째 강화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달라 진전이 없었다.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명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주고,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떼어주며, 조선의 왕자와 신료를 인질로 보내라’며 훨씬 까다로운 조건을 내밀었다. 협상에서 배제된 채 명군만 바라봐야 했던 조선의 속앓이는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초조해진 명군 지휘부는 결국 무리수를 둔다. 일본군이 경상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음에도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沈惟敬)이 이끄는 책봉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 조선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강요했다. 일본이 줄곧 조선 신료를 보내라고 했으니 성의를 보여 동참하라는 요구였다. 일본을 달래는 데 급급하여 조선의 민족 감정이나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횡포였다.

 조선 신료 가운데서도 선뜻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협상에서 소외된 조선의 처지에서 가봤자 들러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사카까지 가는 동안 험한 뱃길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고, 자신의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 격분한 도요토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실제 ‘조선 사신이 일본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는 판이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인물이 바로 황신(黃愼·1560∼1617)이다. 그는 1594년 여름부터 심유경의 접반사로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미 2년 동안이나 적진을 드나드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신은 조정의 명령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앞길을 걱정하면서 위로했지만 황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1596년 8월 4일, 대마도로 가는 배에 오르기 직전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시를 남긴다. “장부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법/ 죽음이 두려우면 장부가 아니리/ 칼날도 오히려 밟을 수 있고/ 끓는 물속에도 뛰어들 수 있는데/ 원하는 바는 절개를 온전히 하는 것이니/ 어찌 몸이 온전하기를 바랄 것인가/ 어질도다 치술랑(<9D44>述郞)이여/ 죽음에 이르러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치술랑은 왕자를 구하러 일본에 갔다가 순국했던 신라의 박제상(朴堤上·363∼419)을 가리킨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뒤 붙잡혔던 박제상은 회유하는 왜왕에 맞서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없고,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며 죽음을 맞았던 인물이다. 황신은 바로 그 박제상을 떠올리며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계속)

한명기 명지대·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