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문화 파워 ⑤ 홍승엽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 [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 예술감독은 “한국 무용수의 기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안무자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가 안무가 육성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다. 정영두·밝넝쿨 등 6명의 안무가를 초빙해 신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김성룡 기자]


‘재야의 고수’는 과연 주류 제도권에 타격을 가할 수 있을까. 현대무용가 홍승엽(49)씨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작품 만들기와 정체성이라는 두 가지 고민이 핑퐁처럼 오간다”고 했다. 하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는 지난해 8월 국립현대무용단 초대 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실력은 유럽 무대에서 통할 만큼 국내 최고의 안무가였지만,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거부하는 등 반골 기질이 농후했던 그였다. 전격 발탁에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던 이유다.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공연이 눈앞에 다가왔다. 29~30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다. 공연을 20여 일 앞둔 7일, 연습실에서 홍 감독을 만났다. “가족 잔치는 끝났다. 우린 무용인이 아닌, 일반인을 위해 춤춘다. 티켓 한 장 더 팔고 싶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용철학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무용계의 오랜 숙원인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됐다. 큰 틀의 방향성을 얘기하자면.

 “무용을 관객에게 돌려주겠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껏 무용은 ‘그들만의 리그’였다. 일반 관객은 철저히 소외된 채 무용인끼리만 지지고 볶았다. 일반 관객 없이 스승이 공연하면 제자가 표 사고, 객석 채우곤 했다. 그런 예술엔 미래가 없다. 우린 일반 관객 한 명 더 모시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을 거다. 무용의 대중화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제 1 목표다.”

 -대중화라고 하면, 말랑말랑한 작품을 하겠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대중화가 저급화는 아니다. 우린 대중의 눈높이를 너무 모른다. 파바로티가 노래할 때 관객이 없는가. 서울시향이 연주할 때 객석이 텅텅 비는가. 좋은 무용을 하면 관객은 온다. 지금껏 무용이 대중화되진 못했던 건 좋은 작품이 적었기 때문이지, 대중의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린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을 끌어당겨야 할 책무를 갖고 있다. 무용의 고급화와 저급화를 확연히 구분하는 기준점을, 국립현대무용단이 제공해야 한다.”

 - 그래도 아직 상당수 관객은 현대 무용은 어렵다고 한다.

 “아직 접해 본 경험이 적기 때문일 거다. 몇 번 맛 보다 보면 낯선 건 사라지기 마련이다. 약간의 훈련은 필요하다. 물꼬를 틀 의무가 국립현대무용단에 있다.

 사실 우리 무용계의 근본적 문제는 따로 있다. ‘어려움’이 아니라 ‘모호함’이 걸림돌이다. 안무자가 자신이 무얼 하는지, 어떤 의도로 이 동작을 짜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자신이 확신이 없으니 관객도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그걸 ‘대중의 이해도가 낮다, 관객이 무식하다’고 탓해선 곤란하다. 전문가들은 안무자 자신의 ‘미정리 상태’를 선결과제로 꼽곤 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어보자. 말로는 설명하기 조금 어렵다. 하지만 좋다는 건 다 안다. 관객이 논리적 언어로 풀긴 어렵다. 그건 평론가의 몫이다. 하지만 좋고 나쁜 건 관객도 알 수 있다. 현대 무용도 마찬가지다. 조금 난해하다 싶어도 구조적으로 타당한 리듬이 있고, 안무가가 그걸 잘 풀어가면 관객은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좋은 예술엔 ‘몰입’이 있다.”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 예술감독

 -상주 단원이 한 명도 없다.

 “단원이 없으니 ‘노조 없애기 위한 술책’이라고 하는데 오해다. 현대 무용은 현대 예술의 최전방이다. 객관화할 수 없고, 지극히 주관적이란 얘기다. 30명 가량의 단원을 둔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거기엔 일정한 틀이 생기기 마련이다. 키나 체구가 엇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안무가들의 스타일은 제 각각이다. 뚱뚱하고 어설픈 동작의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단원을 묶어 두면 안무가의 개성이 표출될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방하고 오픈해야 한다. 작품마다, 프로젝트마다 춤꾼이 달라져야 현대 무용 고유의 탄력성과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다.”

 홍 감독의 이력은 특이하다. 무용과 출신이 아니다. 경희대 섬유공학과를 나왔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5형제 중 막내였다. 형들은 공부를 잘했다. 둘째 형은 외교관, 넷째 형은 변호사였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록음악에 심취했던 소년 홍승엽은 고등학교 시절엔 골방에 처박혀 헤드폰을 쓰고 정신 없이 몸을 흔들었다고 한다. 대학에 가선 서울 강남의 유명 나이트클럽을 기웃거렸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몸을 구겨도 춤이 되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만큼 균형감각이 좋았다는 뜻이다. 끼는 숨길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7개월간 고민에 빠졌고, 몸무게는 50㎏가 됐다.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무용과 문을 두드렸다. 그날로 연습실로 향했다.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추었다. “뼈가 아스라질 만큼 아팠지만, 몸엔 전율이 흘렀다”고 한다. 그토록 반대하던 부모님은 2년 뒤 그가 동아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자 “조상님 중에 어떤 분이 있길래…”라며 그의 춤을 인정했다.

 -단원 대우는 어떻게 되나.

 “한 가지 짚어두자. 국립현대무용단이 들어선다고 갑자기 무용수의 주머니가 넉넉해지는 건 아니다. ‘춤 추느라 힘들다’고 징징대는 후배들, 난 보기 싫다. 힘들지만, 어렵지만 춤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여기에 있는 거다. 화려한 파티를 원한다면 당장 무용 그만둬야 한다.”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해 줘야 한다.

 “과거 민간 무용단에선 무용수에게 한 달에 고작 50만원 주기도 버거웠다. 생활이 안되니 무용수 개개인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고, 그 때문에 연습 시간도 적어졌다. 악순환이었다. 반면 국립현대무용단에선 모든 무용수에겐 시간당 2만원을 지급한다. 하루 5시간 연습하니 하루 10만원, 한 달이면 200만∼230만원이 된다. 물론 풍족한 건 아니다. 200만원이면 한달 최소 생활비는 된다고 본다. 즉 무용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직업 무용수라는 얘기다. 무용의 프로페셔널화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제 2 목표다.”

 -옛날 얘기 한번 해보자.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은 왜 거부했나

 “비디오 심사만으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공연은 관객과의 호흡 속에서 완성된다. 비디오만으로 수상자를 정하는 건, 마치 TV ‘동물의 왕국’을 보고 나서 아프리카 사파리를 탔다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집불통이다. 자기만 안다’고 욕도 먹었지만 이후 실연 심사가 정착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무용계의 파벌주의나 분열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파벌·라인 등은 어디나 있다. 그 문제에만 치중할 때 우리 스스로를 더 갉아먹게 된다. 의견이 다르다는 걸 서로 인정해야 한다. 더 근원적인 건 대학 무용과는 많은데 직업 무용단은 부족하다는 거다. 대한민국에 무용과는 50여 개며, 1년에 배출되는 졸업생만 1500여 명이다. 갈 데가 없다. 직업 무용단이 없는데 공급만 이루어진다. 옷 입을 사람 없는데 디자이너만 넘쳐나는 꼴이다. 그러니 한정된 교수 자리를 따내기 위해 목을 멜 수밖에 없다. 예술 행위와 교육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 시급하다.”

 -창단 공연 작품은.

  “제목이 ‘블랙 박스’다. 지금껏 내가 했던 주요 작품 8개중 가장 강렬한 장면 15개를 솎아내 이를 버무리고 교차시켜 새로운 질감을 선사하고 싶다. 근엄 떨고 싶지 않다. 공격적인 면도 보일 거고, 유머와 위트 안에 철학을 녹일 거다. 5시간을 해도 지루하지 않을 자신 있는데, 2시간만 해야 돼 너무 아깝다.” (웃음)

 -티켓값이 1만원이다.

 “너무 싼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다음부턴 2만원 대를 유지할 거다. 그래도 국립현대무용단의 기본 골격은 ‘저렴한 가격, 양질의 공연’이다. 부족한 제작비는 기업의 후원을 최대한 끌어들일 예정이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