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왕조시대에도 배려받은 구멍가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1880년대 말의 서울 종로 거리. 길 좌우로 구멍만 한 작은 가가(假家)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1895~96년 사이에 이 가가들은 모두 철거되어 일부는 남대문시장으로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시내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동네 가게들은 상회니 수퍼마켓이니 하여 실체보다 훨씬 과장된 간판을 내걸고 반세기 넘게 골목 상권을 장악했으나 대형 마트가 등장함에 따라 거의 자취를 감췄다. [사진 출처 :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서울 인구가 부쩍 늘어난 17세기 이후, 언제부터인가 종로 길 위에 작은 상업용 가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건물을 ‘가가(假家)’라 했는데, 이 말이 변해 ‘가게’가 됐다. ‘국중(國中)의 대로(大路)’였던 넓은 길이 가게들 때문에 비좁아졌다. 열 지어 선 사람이라는 뜻의 열립군(列立軍), 또는 남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는 뜻의 여릿군(餘利軍)으로 불린 호객꾼들과 물건 사러 온 사람들, 그냥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뒤얽혀 가뜩이나 좁아진 길을 가득 메웠다.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종로 1가부터 종로 3가 탑골공원 어귀까지를 운종가(雲從街)라 불렀는데,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거리라는 뜻이다.

 종로는 본래 임금의 행차 때 쓰려고 넓고 곧게 조성한 길이었다. 그 길을 침범해 건물을 짓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었다. 그러나 왕조 정부는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하는 일을 굳이 막지 않았다. 왕의 행차가 있을 때면 자진해서 철거하는 조건으로 묵인해 주었고, 얼마 뒤에는 아예 헐었다 지었다 하는 비용조차 왕실에서 대 주었다. 왕의 행차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가게 철거와 개건(改建)에 드는 비용이 능행(陵幸) 경비의 태반을 점할 정도가 됐다.

 개항 이후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비좁고 불결한 거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1895년 4월 16일, 한성부는 ‘도로를 범하여 가옥을 건축하는 일’을 일절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9월 29일에는 종로와 남대문로의 가게를 모두 철거하고 도로의 원 너비를 회복하며 길가 건물의 외양을 통일한다는 내용을 담은 내부령 제9호가 공포됐다. 종로를 넓고 깨끗하게 정비, 근대 국가 수도의 중심 도로답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정부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길가의 가게를 모두 헐었다. 가게 주인 일부에게는 안 쓰게 된 남대문 안의 선혜청 창고를 내주었다. 이에 따라 1897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으로 남대문 시장이 문을 열었다. 남대문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가게 주인들은 골목골목으로 파고 들어가 구멍만 한 식료품점이나 잡화점을 냈다. 이후 한 세기 가까이 ‘구멍가게’들은 골목 커뮤니티의 중심으로 서민들과 고락을 함께하다가 대형 마트가 등장한 뒤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형 마트의 판촉 자유도, 값싼 물건을 선택할 소비자의 권리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왕조 시대에도 가난한 상인의 생계수단을 뺏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기본은 ‘불인지심(不忍之心)’, 즉 ‘할 수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